──우리 집에는 아처(서번트)가 있다.
  갑자기 시작하자마자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하고 수많은 이들이 어이없어할 것이 눈앞에 선하기는 하지만, 우선은 그 마음을 차분히 진정시키고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한다. 이 이야기 서두 자체는 분명 수많은 이들에게 있어 흥미로운 사실임이 분명할 테니.
 
  만화나 게임, 애니메이션, 소설 등의 다양한 창작매체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분명 태어나 한 번 쯤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게임이나 소설 속의 인물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속의 인물과 실제로 만난다면 어떨까?’
  그건 분명히 쉬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무척이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상황일 것이다. 그 상대가 나쁜 놈이든 착한 놈이든 이상한 놈이든, 어쨌거나 그 어떤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속의 인물’인 이상, 현실에서 존재하고 내 자신이 실제로 그 얼굴을 마주한다는 놀라움과 기쁨만큼은 분명하겠지.
  어쩌면 그렇게 마주한 상대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모험을 떠나본다던가. 혹은 더 나아가, 그 인물과 친구나 연인이 되는 꿈을 꿔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꿈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는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세계관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인물──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것을 확연히 인지할 것이다.
  특히, 이 한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 그 상대의 호적은? 주거는? 그 밖의 상황에 대한 대처는? 앞으로의 내 생활은?
  현실은 늘 비정한 법.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 그 현상은 당신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끝없이 싣고 온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했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들 것이고, 그것은 지겹게도 반복된다.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화려한 꿈과는 전혀 다른 차갑고 매정한 일상. 하지만 이 일상이 시간이 흘러감과 동시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나날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 그리고 그것은 주로──나의 사생활적인 면에서 문제를 일으키고는 한다. 바로 지극히 한국적인── 바로 이런 내용으로.

‌[ 얘, 그 사람이랑 결혼은 언제할거니? ]

‌Written by. J (제이)

‌*Fate/stay night - 아처 (5차) 드림
*현실 내방형(역트립) 드림. 이입 드림주이며, 직접적인 이름표기가 없으나 간접적으로 성씨가 등장합니다.
*아처의 '진명'에 대한 표기나 스토리의 직접적인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내용은 없으나, 본 원작을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 보시기엔 살짝이나마 스포일러로 여겨지는 묘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해당 드림캐가 나오는 작품에 대한 영업문구(?) 같은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가볍게 무시하여 주셔도 무관합니다.


‌  여러분은 이야기 속의 인물이 현실에 직접 오게 된다고 한다면──가장 먼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기쁘다, 즐겁다, 행복하다?
  그렇겠지. 그것도 분명 당연한 마음일 것이다. 상대는 어쨌거나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속의 그 사람이니까.
좋아하는 인물이 눈앞에 서 있는 것 자체는 기쁠지는 몰라도, 내가 느꼈던 생각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하고 현실적인 대답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곤혹을 느낀다’─였다.
  나와 비슷한 답을 낸 이들도 분명 많으리라. 그리고 곤혹 이상으로, 예고도 없이 일어나는 그런 상황에 혼란과 공포를 느끼는 이들도 분명 적지는 않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꿈과 현실은 다르다고 하는 것처럼, 내겐 그저 현실의 벽이 너무나도 높은 철벽이었을 뿐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까지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는 각설하고, 그럼 이야기는 다시 모두(冒頭)로 돌아가서──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 집에는 아처(서번트)가 있다.

  “확실한 호적을... 네 신원을 만들자.”
  “......하아.”

  그 뜬금없는 말에, 남자는 커피를 건네려고 하는 손길을 멈췄다. 그는 내 바로 눈앞에서 의욕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하얀 백발. 이 남자가 바로 유일무이한 나의 서번트, 아처──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클래스는 분명 세이버라고 생각하기 쉽상이겠지만 그는 유감스럽게도 아처다. 아니, 왜 아처냐고 전력으로 태클을 넣고 싶어도 지금은 우선 그 마음을 접어두도록 하자. 일단 활도 쓴다. 아처가 맞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분명 여러분들도 Fate/stay night를 보면 알테니까 우선 그쪽을 보자. 시험 삼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납득하자. UBW를 먼저 보자. 잘 부탁드립니다.
  어쨌거나 눈앞의 이 사람이야말로 지금으로부터 4년여전, 어느 날 갑자기 내 방에 소환된 붉은 궁병─마술사가 없는 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서번트이자, 실제로 내 눈 앞에 존재하게 되어버린 이야기(픽션) 속의 존재(캐릭터)가 되시겠다.

  “이번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또 엉뚱한 이야길 꺼내는군, 마스터.”
  “아니, 나 꽤 진지하게 생각한 건데......”
  “.......”
  “왜 그런 얼굴로 보는 거야.”
  “이미 4년이나 함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매우 늦은 결정일 뿐더러, 지금까지도 별 문제가 없었으니 이제 와서 별 의미도 없지 않나.”
  “어...... 그것도 그런가.”
  “....바로 그렇게 납득 해버릴 거라면, 왜 그런 말을 꺼낸 건지 더욱 의도를 모르겠다만.”

  하아, 하고 방금 전보다도 더욱 길게 한숨을 내쉬고선 아처가 재차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불쌍한 아이를 보는 것 같은 그 깊고 아련한 시선은 좀 거두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진짜 너무하다고 작게 투덜거리는 나를 향하여 아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 네가 내 신원을 만들기엔 너무 무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내 신원이 불확실한 것으로 뭔가 문제가 된다는 거라면, 당분간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 좋은가. 그렇다면 마력을 아낄 겸, 한동안은 영체화를 하는 게....”
  “아니, 그런 문제는 아닌데....!”
  “아아... 혹시나, 생활비의 문제인가? 얼마 전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으니, 금전문제라면 염려마라. 절대 네 부담이 되지는 않을 테니.”
  “아니, 너 아르바이트는 어떻게.... 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다른 문제가 있거든....”

  문제가 있다는 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아처가 눈을 깜빡이며 제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흠, 하고 가볍게 턱짓을 하며 말을 이어가달라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목소리가 점점 더 바닥을 기는 것을 느꼈다. 이걸 내 입으로 말하라는 건가. 실화인가. 아니, 진짜인가.
  
  “그으.... 다들..... 너어랑.... 언제...........냐고.....”
  “마스터?”
  “아니, 너랑......”

자꾸 말을 흐리며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아처가 의아한 듯이 허리를 숙이고는 바짝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훨씬 더 허둥지둥하며 당황하는 나를 보던 아처가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너와 나에 관하여 뭐라고 말한 건가? 혹시 안 좋은 말이라도 들은 건가.”
  “..........”
  “......마스터?”

나는 내 사생활에 대한 이 위협을 입에 담아야 하는가. 진정으로 그래야만 하는가. 머릿속에서 한참 자문자답을 반복하고 나서야 간신히 아처와 다시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아처는 걱정스러운 듯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말하자. 어차피 한번 창피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너랑, 결혼, 언제 하냐고, 사람들이!!!”

  조용한 적막이 방 안에 흘렀다. 내 방은 이렇게 조용하고 썰렁했던가. 놀란 아처의 손 안에서 컵이 떨어질 뻔했다. 허겁지겁 그가 다시 그것을 잡아내긴 했지만 아처도 예상외의 말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늘 붙어 다니는 아처와 나─성인남녀의 모습을 보니 주변인들은 그렇게 보는 모양이지만, 애초에 우리들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아니, 뭐 서로가 소중하고 좋아하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사귀는 사이는 아닌 그런 관계인 것이다. 굳이 칭하자면 친구이상의 호의적인 관계나 주종관계 이상 애인 미만 같은 느낌에 가깝겠지. 이렇게 칭하니 역시나 위화감이 들지만 어쨌거나 우린 그런 가까우면서도 먼 느낌의 사이인 것이다.
  아처가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다 두고서 조용히 제 이마에 손을 짚었다. 마치 머리가 아픈 것이라도 한 것만 같은 제스쳐였다.

  “.....그 이야기가 대체 왜 내 신원이나 신분으로 발전 되는 거지, 마스터.”
  “어..... 너랑 결혼하려고?”

  ─쾅!
  그 물음에 태연하게 대답하자마자 아처가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말했다시피 우리들은 연애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힐끗하고 테이블 위에 시선을 던지자, 커피가 담겨있는 머그잔은 크게 출렁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없어보였다. 커피는 무사했다. 아마 방금 전의 이야기보다도 더 예상외의 대답이었는지, 이쪽을 보는 강철색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니까, 왜 이야기가 그렇게.....! 그보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 건가!?”
  “자꾸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적당히 너에 대한 거 얼버무리는 것도 너무 귀찮고... 그냥 이 기회에 신분도 만들고, 내 호적에도 올리면 일석삼조인데......아, 참고로 네가 내 성을 따서 박아처가 되는 거야.”
  “너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나!? 너는 일단 여성이잖나, 그런 상대를 결정하는 것은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신중하게....”
  “그러니까, 나 진지하게 생각한 거라니까. 그리고 여성이라느니 그런 말은 요즘 시대엔 시대착오적이야.”
  “마스터──!!”

  목소리를 높인 아처가 당황한 어투로 외쳤다. 그 눈은 여전히 혼란스러움이 묻어났지만, 그것과 동시에 걱정이 들어차있었다. 대체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굴 생각하고 있고, 뭘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눈앞의 아처를 바라보며 그게 너무나도 이상해서 웃음이 새었다. 처음에는 소리 없이 입 꼬리만 끌어올려 웃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크게 소리를 내서 웃고 있었다. 숨이 넘어가듯 웃는 내 등을 상냥하게 쓸어주면서도 그가 얼굴을 구기며 퉁명스레 나를 불렀다. 마스터. 그 봄볕 같은 온기가 섞인 목소리에 다시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삼켜내고, 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을 이었다.

  “4년이야, 아처.”

  그래, 그가 이쪽(현실)에 온지 어느덧 4년여가 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평화와 눈부신 나날들. 갑작스레 눈앞에 소환된 바로 그날부터 시작하여, 줄곧 함께 지내온 시간.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나타난 그 때처럼, 어느 날엔가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을까하는 그런 우려를 끌어안은 채로 그렇게 함께 지내온 시간이 벌써 3년 하고도 1년 더.
  이쪽을 바라보는 불안함이 섞인 시선을 무시하며, 나는 테이블 위의 머그컵에 손을 뻗었다. 따뜻한 헤이즐넛 커피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아처가 끓여온 커피는 무척이나 달았다.

  “나는 그게 좋아.”

  그런 불안정하고 매정한 일상이, 네가 있는 나날이. 아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머그컵을 다시 내려놓고,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아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허리를 숙인 그의 손이 다시 내 등을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넘쳐흐르는 사랑스러움. 스스로가 안고 있는 감정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금껏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우기고는 있지만, 뭐 이런 생각을 한다는 시점에선 아마 분명 그런 것이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정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강철색이 보이자 나는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을 느꼈다.

  “대답 안 해주면 나 령주 써버릴 거야.”
  “.......몇 번이고 말하지만 령주를 가볍게 쓰려고 하지마라. 무엇보다 사용할 줄도 모르면서.”

  등에 닿아있던 온기가 천천히 멀어져가나 싶더니, 이내 그것은 소리 없이 내 긴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엉켜있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풀려나가고 아처의 손가락이 섬세한 움직임으로 그 끝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상냥하고, 다정한 손길. 마치 자그마한 생물을 쓰다듬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울거리는 끝자락에 내려앉은 손가락이 그것을 조심스레 집어 올려, 천천히 남자의 입가로 가져갔다.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는 부드러운 입맞춤.
  나는 그 순간, 언젠가 그와 이야기 했던 약속을 하나 떠올렸다. 언젠가 그의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잘라주었으면 한다는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약속. 멀지 않은 날에, 함께 바다를 보러가자는 그런 소소한 기억.

  ‘얘, 그 사람이랑 결혼은 언제할거니?’

  아는 사람들에게 한 번씩 들었던 바로 그 물음이, 때 마침 머릿속에서 울렸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흘러 넘기던 내 대답은 앞으로 분명 이렇게 바뀔 것이 분명했다.

  ──아마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