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해석 주의
*설정 날조 주의
*급전개 급마무리주의



  퇴근 후 건물 옥상 위로 올라가 아래를 지켜보는 것만 몇 번째일까. 분명 그곳을 올라가는 건 분명 이유가 있어서일 텐데. 알면서도 겁이 나 그러지도 못하면서 매일 똑같은 풍경을 바라만 본다. 누구나 힘든 걸 마치 자신만이 힘든 것 마냥 생각하고 있었다. 지쳐서 그런 거라고 쉬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버텨오던 것도 이제는 한계라고. 머리는 그랬지만 몸은 또다시 출입문 쪽을 향했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몸이 기우뚱하더니 뒤로 넘어갔다. 이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있는 건물이 빠르게 움직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눈앞에 있는 늘 밟고 다닌 시멘트 바닥이 가까워졌다.



  몸이 크게 움찔하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겨우 숨을 몰아쉬며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낸다. 자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꿈은 무슨 꿈일까. 드디어 학생 때 크지 못했던 키가 다시 자라려고 그러는 걸까. 투덜거리며 중얼거리니 뺨을 감싼 따스한 온기에 고개를 들었다.
  현실이었다. 새삼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저를 보고 걱정하는 얼굴을 하는 모습까지. 좀 전에 무슨 꿈을 꿨더라. 순간 잊어버린 것 같다. 옆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침대 위에 떨어져 있는 머리끈을 주워 다시 묶었다. 물론 잠결에 묶는 거라 제대로 묶이진 않았겠지만.

  “죄송해요, 보현진인 선생님. 저 때문에 깼죠….”
  “괜찮아. 지금은 어때?”
  “당연 괜찮죠! 그런데 잠은 안 오네요. 내일이 휴일이라 다행이긴 한데 같이 장도 봐야 하고 산책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손가락을 접어가며 말했다. 하루 만에 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접힌 손가락이 늘어나면서 얼굴엔 기쁨이 퍼져갔다. 접힌 손가락을 몇 개 펴다 행동을 멈춘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자 저를 바라보는 얼굴이 너무 좋았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를 보며 웃었다. 이곳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언제까지 함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만큼은 이곳에서 함께했던 즐거움만 남기게 하고 싶었다.
  즐거워 보일 때마다 가끔 보현진인 선생님은 저와 함께 있는 게 괜찮은가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뭐라고 대답이 나올지 몰라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한다. 나와는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만 이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는 같아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었다. 좋은 생각만 하자고 생각했다.

  “내일, 아니 몇 시간 뒤가 기대돼요.”
  “나도 그래.”
  “정말요?”
  “응.”

  바람에 흔들리다 위로 올라가는 커튼 사이로 구름 속에 있던 달이 드러났다. 저 얼굴에 달빛이 더해지니 더 반짝인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걸 깨닫자 바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빨개진 얼굴을 들켰을까.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려야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일단 아무 말이나 하자고 생각했다. 말은 내뱉었지만 부끄러워서 그런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너무 기대돼서 잠이 안 와요…….”
  “그럼 따듯한 우유라도 한잔할까?”

  몸을 일으켜 우유를 가지러 가는 동안 자기가 준비하면 된다는 말은 점점 기어들어갔다. 반칙이다. 저렇게 잘생겼는데 성격까지 좋다니……. 그동안 너무 못생긴데 성격까지 안 좋은 남자들만 보다가 눈이 호강되는 것 같았다. 여기서 함께 생활한지 며칠이 지났는데 이런 상황에서 보는 게 처음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말 잘생겼다며 몇 번씩 속으로 생각했다.
  혼자서 열을 식힌다고 손부채질을 열심히 하다 내밀어진 컵을 잡았다. 따뜻하다. 자신도 따듯한 우유가 든 컵을 들고 옆에 앉았다. 커튼끼리 맞닿아 나는 소리 때문인지 부는 바람이 더 크게 느껴졌다. 달빛이 살짝 옆으로 옮겨가 둘이 있는 곳엔 약간의 어둠이 찾아왔다. 그 어둠 속에서도 얼굴은 잘 보인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 일단 따듯한 우유를 마셨다. 몸까지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 뜨겁거나 그러진 않아?”
  “네…. 네! 괜찮아요. 그…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요.”
  “그럴 수도 있지.”
  “보현진인 선생님.”

  따듯한 우유를 마시려다 저를 부르자 우유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어쩌자고 부른 건지. 할 말을 찾아야 한다. 어떤 주제로 말하는게 좋을까. 이쪽 세계와 관련된 일은 모를 것 같고 그쪽 세계와 관련된 일은 물어보기가 무서웠다. 두 가지를 충족시킬만한 대화가 뭐가 있을까.

  “고마워서요.”
  “뭐가?”
  “저... 사실 잠에서 깬 게 그날에 있었던 일에 관한 거였어요. 우리 처음 만난 날.”
  “그랬구나.”
  “보현진인 선생님이 없었다면 저는…….”

  열린 창문 밖에서 술 취한 아저씨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색해지고 가라앉은 분위기. 이러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는데. 후회하면서 제 머리를 붙잡았다. 빠르게 올라간 손 때문에 기울어진 컵, 안에 있던우유가 찰랑이며 컵 밖으로 흘러나왔다.

  “앗 뜨! 아니, 뜨거운 건 아닌데… 흘렸다…!”
  “다치지 않았어?”
  “네, 안 뜨거워서 괜찮아요! 아! 죄송해요!”
  “난 괜찮으니까 진정해.”
  “어떡해, 수건 가져올게요!”

  우유를 흘리고 흘려서 당황하고 준비해준 우유를 흘린 것에 미안함을 느껴 자신이 치우겠다는 행동이 3단 콤보로 진행이 되어 우유를 바닥에 쏟은 체 보현진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컵이 굴러가다 침대 발에 부딪혀 멈춰 서고 머릿속은 하얗게 되었다. 죄송합니다만 중얼거리던 입은 점점 커졌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에도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상대에게 들릴까 부끄러워졌다. 자신은 왜 이렇게까지 덜렁할까. 자책을 하는 단계로 들어가기 전 말을 멈췄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머리카락 타래가 흔들렸다. 머리카락 타래가 부딪치는 곳엔 손등이 까딱이고 있었다. 느리게 등을 토닥이는 느낌이 전해지자 진정을 한 듯 고개를 들었다.

  “진정됐니?”
  “……네.”
  “얼굴이 빨간데… 아픈 건 아니지?”
  “괜찮아요. 아, 아 참! 수건, 수건 가져올게요!”

  빠르게 일어나 세탁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 썼던 수건을 꺼내왔다. 바닥에 흘린 우유를 닦는 동안 보현진인은 침대 발 쪽에 있는 컵을 들었다. 쏟아진 우유 탓에 커튼 사이로 드러난 달 쪽으로 얼굴이 나왔다. 고개를 숙이니 드러나는 빨개진 귀. 보현진인은 제 컵까지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제 자리로 돌아와 썼던 수건을 챙겨 함께 바닥을 닦는다. 조용해진 방안, 어색함을 깬 건 다름 아닌 보현진인이었다.

  “이곳에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너를 만났으니까.”

  말을 끝내고 어깨와 머리를 기대왔다. 보현진인의 말에 고개 들고 위아래로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조금은 밝아진 하늘. 누군가는 일찍 밖을 나선 시간이 된 걸 모른 체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마저 바닥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