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작스럽지만 제 눈앞에 갑옷을 입은 남자가 쓰러져 있습니다.
  아니 왜? 잘못 봤나 싶어서 골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봤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골목 구석진 곳의 벽에 몸을 기댄 채 축 늘어져 있는 남자가.
  아니... 그러니까 왜?

  ‘......코스튬 플레이어?’

  머리 위에는 한 쪽만 비스듬히 잘린 뿔이 쫑긋이 나 있고, 등 뒤에는 넝마처럼 된 커다란 날개가 펼쳐진 채 한가득. 그리고 뒤에 저건...... 설마 꼬리인가요.
  아니 그보다 대체 왜 이런 곳에. 대체 왜 쓰레기통 사이에. 대체 뭐 때문에 비도 오는 날에 이런 골목에서 코스튬 플레이어가 노숙을. 아니 그보다 이 사람 코스튬 플레이어 맞아? 방금 꼬리가 움직였는데? 저거 원래 움직이는 건가? 현대의 과학기술은 거기까지 발전해 버린 것인가?


  ......그럴 리가 없지.
  몹시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건 실제 상황이다. 왜지? 내가 살아 숨쉬는 세계가 누군가의 역트립 합작 제출물이라도 되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잠깐 빗소리 사이로 현실의 근간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냥 옆에 있던 쓰레기봉지가 남자의 꼬리에 맞아서 쓰러지는 소리일 뿐이었다. 아니 아... 그게 왜 움직여요? 아저씨 토르 3세예요? 남자는 체격도 말이 안 될 정도로 커서 쓰러져 있는데도 머리가 거의 내 골반까지 올 정도였다. 솔직히 좀 무서웠다. 이 생물이 살아 있다고? 아닌데? 내가 보기에는 과학기술로 움직이는 안드로이드인데?


  “저, 저기요...”
  “......”
  “저기요......”

남자는 답이 없었다. 그래도 시체는 아닌 듯 하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어깨가 보였다... 로봇 아닌가? 진짜로 로봇이 아닌가? 어깨를 붙잡고 살짝 흔들어... 보려다가 갑옷이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아무리 비가 와서 젖었다지만... 이거 철이야? 진짜 철이야? 왜? 그래야 할 필요가 있어?

  잠시 갈등을 좀 해 보자.
  구체적으로 무슨 갈등이냐면 내가 이 유사인류형 로봇 같은 남자를 구조해 갈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갈등이다. 이유라면 별 거 없다, 내가 방금 피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이걸 녹슨 쇠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코에는 그냥 피 냄새였다. 젖은 물 냄새 사이로 아직 식지 않은 피에서 나는 날것 냄새가 났다. 어두운 골목이라 보이지도 않았는데 바닥에 고인 게 그냥 물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굳이 알고 싶진 않았다.
  설마 이 사람도 없는 골목에 아인종 모양의 로봇을 배치해둔 뒤 피 냄새의 향료를 들이붓고 24시간 밀착취재 만약 골목에 아인종이 쓰러져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편 몰래카메라 시리즈를 찍을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 것인가? 물론 그 경우라면 그냥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말겠지만 아니라면 난 이 골목에 죽어가는 사람을 내팽개치고 떠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매년 매월 매일 이 골목을 지날 때마다 핏자국과 함께 이 날을 영원토록 후회하게 되겠지... 같은 외국 문학. 그치만 이 남자를 어떻게 옮기라는 거야. 병원? 병원에... 연락하면 생체실험이나 당하겠지! 외계인 같은 걸로 남아서! 해부하겠지 다들! 아마 그러겠지! 그럼 나는 또 살아있는 사람을 해부실로 넘겨버린 희대의 발견가가 되는 거고!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평생 그 때 그 사람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의 전개로, 뭘 하더라도 부정적일 것 같은 생각만이 남았기에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에 그거가 있다, 그거. 그거. 손수레 그거. 이제 누가 비 오는 날에 사람 다리와 뭔가의 날개가 나와 있는 손수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경찰에 신고하지만 않으면 된다. 신고 안 할 리가 없잖아요. 그런 사람 보면 보통 신고하죠. 심지어 피 냄새도 나는데요. 보통 신고하죠. 운 안 좋으면 그 자리에서 때려눕혀지죠.
  과연 나는 경찰서에 가게 될 것인가? 살인 및 시체 유기 방조 훼손죄로 무기징역을 사서 창살 안에서 콩밥만 먹고 살게 될 것인가? 그것과 평생 보지도 못한 아인종을 죽게 두어서 남은 나날을 눈물과 후회로 지새우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나쁜가? 아니 안 걸리는 선택지는 없는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뭐 내가 돈이 없었으면 좀 더 길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원래 이 세계는 돈이다 돈. 돈이 많으면 잡혀가도 뭐 어떻게든 될 것이다. 아니 애초에 안 잡혀가겠지. 그러나... 돈이 있어도... 이 돌아버린 달구지가 무거운 것은 어떻게 안 되는 모양이었다.

  “......”

  아니 바퀴 달렸잖아요, 가벼워주세요.
  그보다 이거 실려 가는 도중에 죽는 거 아냐? 안에 실을 때까지만 해도 살아는 있었는데... 혹시 정말 누가 신고할까봐 까만 천으로 덮어 놨는데 비주얼이 더 흉흉해졌다. 천을 걷으면 시체가 된 아인종이 들어있을 것 같아서 두렵다. 아니야, 이 남자의 생존력을 믿어 보자. 생긴 것도 무슨 서리거인 유사품 같은데 생존력이 거인까진 아니더라도 서리까지는 되겠지. 거기다가 내 귀여운 핑크색 우산(어저께 새로 삼)도 수레 위에 씌워놨단 말이다. 물론 지금 젖고 있는 걸 보니까 하나도 쓸모없고 불쌍하게 추적추적 비를 맞아서 교복이 다 젖어가고 있는 내가 쓸 걸 그랬다는 후회감이 다소 들긴 하는데 아무튼.


  “쿨, 럭...”
  “으아아 좀 참아봐요!”

  다행이다 아직 살아있다! 근데 곧 죽을 것 같아! 무슨 마지막 숨을 뱉어내는 인간 같은 탁한 기침 소리에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가 다시 느려졌다. 힘들다. 무거웟. 살고 싶으면 댁이 좀 걸어 봐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은데. 이대로 내버려둬도 아저씨가 나보다 두 배는 더 오래 살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십 분 후에 비명횡사할 것 같은데요. 집이 가깝지만 않았어도 죽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제가 지금. 십 분 안에 도착하지 못했으면 저희 둘 다 지옥에 있을 거라구요.

  “...그러니까 좀 참아 봐요, 제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잖아요...”

  대답이 더 없어서 일단 뛰기로 했다.




  ‘...그러니까, .......제가......’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매그너스는 단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건 어쩐지 기분이 몹시 안정되는 향이었다.
  배가 욱신거렸다. 입에서는 꺼끌거리는 피 맛이 났다. 그런데도 피부에 닿는 감촉은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웠고, 코끝에 닿는 공기는 부드러워 기분이 온화해지는 온도였다.
  멍하니 뜨인 시야가 흐릿했다. 흰 천장이 늘 보던 것보다 밋밋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에 쥔 이불이, 평소와는 달리 몹시 부드러웠다. 그가 쓰던 비단의 감촉이 아니라 뭔가 짧고 부드러운 털을 촘촘히 붙여놓은 것 같은 따스한 감각이었다. 열을 머금은 천이 생소하면서도 어쩐지 아늑해서, 그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는 그대로 눈을 감고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일탈적인 생각이었는지 알았겠지만, 매그너스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이상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가... 어디......”

  목이 아팠다.
  매그너스는 몇 번 기침하다가 헛구역질을 조금 했다. 피 냄새가 목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상체를 일으키자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배 안을 마구 긁어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비틀대며 침대의 머리맡에 겨우 등을 기댔다.

  “콜록, 쿨럭, 컥...”

  온 몸이 쑤셨다. 팔다리가 얻어맞은 것처럼 저리고 조금만 움직여도 온 관절이 전부 삐그덕대며 비명을 질렀다. 매그너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이... 그거다, 빌어먹을 카이저 놈에게 거세게 얻어맞은 게 마지막이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 정도의 빛이 터져 나왔던 것을 보았다. 제 선대처럼 프로미넌스라도 쓴 모양이지. 망할 놈.

  “두 번이나 그걸 맞고 살아 있는 나도 독한 놈이군...”

  몸이 너덜너덜했다. 사지에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몸의 군데군데가 욱신대고 발등이나 팔꿈치 따위가 까진 것처럼 시큰시큰하게 아려오는 것도 느껴졌다. 매그너스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시야가 아직 좀 흐릿했지만 배 위로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은 보였다.
  누군가 자신을 이 낯선 곳으로 데려와 치료해 준 것 같았다. 그것까지는 알겠으나, 대체 누가? 판테온 측의 탈환군들은 죽이면 죽였지 절대로 그런 친절을 베풀 놈들은 아니었다. 그야 그럴 것이, 뭐가 곱다고 어느 누가 멋대로 수도를 침략하고 동족들을 있는 대로 살해한 놈을 치료해 주고 앉아 있을 것인가.
  죽지 않게만 처치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상냥한 처사였다. 침대는 왕실의 것만큼이나 푹신푹신했고, 이불에서는 사탕 같은 냄새가 났다. 공기 중에 맴도는 달콤한 향은 그가 누운 침대 옆의 서랍에서 나고 있었다. 서랍 위에 단 향을 내는 물을 올려둔 것 같았다.
  그것보다 시야가 온통 분홍색인 게 신경 쓰였는데 그가 눈을 다쳐서 보는 환각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벽지가 분홍인 거였다. 이제 보니 이불도 분홍색이었다. 매그너스는 맞은편의 옷장 같은 것 근처에 토끼 인형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무슨 가구 배치를 만화처럼 해 놨다고 생각했다.

  ‘......어린애 방 같잖아.’

  육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살펴보고 나니 몹시 신경 쓰였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이런 유치한 파라다이스 같은 곳에 놓여 있는 것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아서 신경 쓰였다. 그리고 붕대도 미묘하게 엉성했다. 방의 분위기가 다정다감한 것과는 별개로 엉성했다. 붕대가 몸뚱아리에만 감겨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또 처음이었다.
  매그너스는 욱신거리는 팔을 들어 붕대를 죄다 풀어헤쳤다가 다시 감았다, 안쪽이 피로 젖어 있었지만 붕대를 감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인지 피가 그리 번져 있지는 않았다. 심한 꼴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큰 상처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왜 죄다 벗겨져 있는 거지.
  그야 갑옷 차림이었으니 어느 정도 벗겨내는 것도 이해는 한다만 속옷까지 벗겨져 있는 건 좀 신경쓰였다. ...왠지 좀, 몸이 미묘하게 보송보송하기도 했고. 상처가 따끔하게 아픈 것도, 꼭 누가 물이라도 묻혀서 닦아낸 것처럼...

  “......”

  처럼이 아니라 정황상 누가 나를 싹 벗기고 물수건으로 닦아낸......
  죽다 살아나서 그런 걸 신경 쓰는 것도 좀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매그너스는 기분이 좀 그랬다. 살아났으니 이런 것도 신경 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죽었으면 그런 거 없다... 그는 미간을 좁혀 인상을 쓰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목 뒤가 뻐근했다.

  “세상에, 벌써 일어났네.”
  “......여긴 어디지?”
  “와,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콜록, 켁... ...한국말이 뭔데.”
  “앗... 너무 오타쿠 문학 도입부 같아서 소름돋아......”

  매그너스는 인상을 구겼지만 방으로 들어온 소녀는 어깨만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소녀라고 칭했지만 그리 어리게만도 보이지 않는 몸이었다, 팔다리가 길고 목덜미가 늘씬해서 마치 암사슴 같았다.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해 천진한 인상일 뿐이었다. 나비 같은 속눈썹이 또렷하게 검고 긴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늘어져 있는 것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로 흰 원피스의 어깨 부근이 젖어 있었다.
  뿔도 꼬리도 날개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노바족은 아니고, 메이플 월드에서 보곤 했던 인간인 모양인가, 귀나 손발 같은 곳에도 달리 특이한 부분이 없다. 굳이 눈에 띄는 것이라면 눈과 머리칼이 진하고 선명한 묵빛이라는 것이었다.

  “몸은 괜찮아요?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그 정도로 심한 상태였나? 그래 보이지는 않던데.”
  “제가 지금 아저씨 살려드린 거예요.”
  “......아저씨?”
  “으흠?”

  작은 얼굴에 ‘양심이 있어야지’ 라는 표정이 글씨로 쓴 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매그너스는 왠지 입맛이 매우 써졌지만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표정이 저절로 떨떠름해졌다.

  “일어나셨으면 뭐라도 드시겠어요? 죽 끓여 드릴게요.”
  “......그러지.”

  인간 여자아이는 그의 구겨진 표정을 흘끗 보고는 그냥 말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무시인지라 매그너스조차 잠시 자신이 읽고 씹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 아저씨라면 아저씨인 거지 어쩌겠는가. 저런 꼬맹이한테 오빠 소리라도 들으려는 건가. ......사실 뭐 그렇게 부른다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 기다리세요, 상처 덧나니까 움직이지 마시구요.”
  “......잠깐.”

  그러고 보니까 생각났는데.
  신경 쓰이던 걸 아직 묻지 못했다. 불러 세운 목소리에 여자아이가 고개를 기웃하며 뒤돌았다. 몹시 순진무구한 표정이었지만... 맥락과 대사로 보건대 그를 데려와 간호한 것은 이 여자임이 틀림없었다. 아마 이 방도 본인 것일 테고, 말인즉슨 그러니까...

  “나... 알몸인데.”
  “제 이불이 더러워지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더럽게 찝찝했다. 벗겨졌다는 것을 확인당한 매그너스는 조금 수치와 굴욕을 느꼈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대수롭잖은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뭐. 남한테 보이기 부끄러울 만한 것도 아니던데요.”
  “......이봐.”
  “제가 생각하기엔 그 정도면 시골 아낙네가 놀라서 잘라 전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미쳤나?”

  확인 사살 당했다.

  “굳이 벗길 필요가......”
  “죽 끓여 올게요!”
  “......”

  매그너스는 몹시 떨떠름하게 이불로 몸을 가리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닭이 있어서 다행이야.”

  왜냐면 다른 죽이면 내가 맛이 없기 때문이다.
  환자식은 모르겠고 완벽하게 내 취향만 반영된 닭죽이 완성되었다. 진짜로 닭에 쌀만 있고 짭짤하다. 사실 소금을 넣고 나서 이게 환자식이라는 걸 자각했다. 알 게 뭐야, 강하게 크세요. 짜면 물 붓던가.
  그것보다 역시 굉장히 양산형 판타지 트립물 전개인데. ‘한국? 거기가 어디지?’ 는 말이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저 사람은 아닌 무언가가 정신이 나가서 자신을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의 무언가라고 믿고 등 뒤에 날개와 꼬리를 매다는 수술을 한 게 아니고서야 진짜 다른 세계에서 온 뭔가가 아니지 않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기절초풍할 일인데, 담이 강한 건지 의외로 이런 일은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닌 건지 왠지 별 감각이 없었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그 날개 움직이고 있었다고.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걸 믿지 않는 것보다 그냥 내가 양산형 판타지 트립물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편하다. 무심결에 찬장에서 코코아를 꺼내려다가, 상대가 환자인 것을 감안하여 그만두었다. 환자 앞에서 나 혼자만 코코아 먹을 수도 없고.

  ......그렇게 신기한 색의 눈은 처음 봐.
  벗겨놓고 닦을 때부터 이게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지만, 게다가 배 위에 난 커다란 상처도 온 몸에 든 멍도 정말이지 처음 보는 종류들 뿐이었지만, 그래도 가장 이상한 건 그 눈동자였다.
  파충류 같은 빛나는 눈동자, 빛을 받아 얇아진 동공과 굳어진 뺨에 쏟아지는 형광등의 발자취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그리고 지나치게 양감 있는 광경이었다ㅡ이상하게도, 그래서 모든 것이 또렷했다. 희미한 현기증을 느끼며 바라본 밤의 정경처럼 동떨어진 듯 하면서도 끝도 없이 가까워 보이는, 조각조각 분리된 현실의 흔적이.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살갗에 닿는 바람의 감촉에 집중해 보고는 했다. 꿈과는 다르게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존재감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여전히 내가 쥐고 있는 그릇은 차갑고 명확하게 매끄러웠다. 상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래서 어쩐지 지금 발걸음을 옮기더라도 그가 어딘가로 사라져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사실 그럴 것 같은 상황이긴 하잖아, 문을 열면 그냥 환상만이 남아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게 허무맹랑한 망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보아서는 그냥 이 상황에 순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 사실 아까부터 솔직히 내가 미친 게 아닌가 생각하긴 했다... 아마 아니겠지. 그리고 이렇게 생생한 환각이라면 미쳤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죽 드세요!”
  “큭, 깜짝이야.”
  “움직이지 마시라니까요.”

  그리고 이 사람의 존재는 손수레 끌고 왔을 때부터 내 뜻대로 된 적이 없어서 그냥 환각이 아닌 것 같고.
  지금도 누워서 얌전히 기다리라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침대 위에 엎어지질 않나... 한심함을 느끼지 않게 주의하며ㅡ왜냐면 그건 무례한 일이니까ㅡ서랍 위로 살짝 죽 그릇을 올려 주자 벽지에 머리를 기댄 채로 끙끙대던 남자가 내게로 노란 눈동자를 굴렸다.

  “벽지 긁히니까 주의해 주실래요.”
  “......젠장할, 노바를 집에 들일 거면 그 정도는 염두에 뒀어야지.”
  “이름이 노바예요? 그 나이 먹고 삼인칭 쓰시는 거 부끄럽지 않나요?”
  “아니, 젠장, 아니야!”

  남자는 분노한 목소리로 으르렁대다가 이내 낮게 신음을 흘리며 벽에 늘어졌다. 굵은 손이 붕대가 감긴 배를 감쌌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는 얇게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다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아무튼 노바가 이름이 아니라는 정도는 너도 알 텐데.”
  “몰라요, 그런 거.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아, 메이플 월드 놈이란. 기본 상식도 없나?”
  “전 메이플 월드 놈이 아니니까요?”
  “뭐? ...그럼, 그란디스 놈이라도 된다는 거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둘 다 아니고 여기는 지구랍니다. 쨔쟌! 당신은 이세계에 떨어졌습니다!”
  “뭐......?”
  “그보다 죽 좀 드세요.”

  많이 많이 먹어야 빨리 낫는다. 상태를 보아하니 가만히 둬도 나을 것 같긴 하지만 집주인의 역할이라는 게 이런 것 아니겠는가. 죽을 한 숟갈 퍼서 입 근처에 갖다대자 말을 잃은 듯 벌려져 있던 입술이 조개처럼 딱 다물렸다.

  “죽 드세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해 놓고 지금 죽이 문 으븝.”
  “맛있죠?”
  “......”

  숟가락째로 씹고 있다.

  “숟가락은 먹는 거 아니에요.”
  “...... ...나도 알아.”
  “맛있죠?”
  “...좀 짠데. 이세계에 떨어졌다는 건 무슨 말이지? 제대로 설명해. 그렇지 않으면...”

  남자는 위협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손을 움직이다가 행동을 멈췄다.

  “...젠장, 내 칼 어디 뒀어.”
  “칼이요? 그런 건 없던데요.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칼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멍청이도 아니고. 자, 죽 한 입 더 드세요.”
  “아까부터 죽 타령이야! 독이라도 넣었냐?”
  “한국에서 그런 걸 어떻게 구해요, 그럼 잡혀간다구요.”
  “......”
  “못 믿겠으면 이따 티비라도 좀 보세요, 밖에 나가시지는 말고요. 생체실험 당하실 테니까.”
  “......”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뭐 어쩌라구, 진짜인데. 또 의심할까봐 한 입 먹고 내미니 남자는 몹시 미간을 좁히면서도 죽 그릇을 받아들었다.




  “이게 젠장 어떻게 된 일이야.”
  “제가 그랬잖아요, 여기 이세계라니까요.”
  “넌 대체 왜 그런 걸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거냐!”
  “제가 안 태연했으면 아저씨 죽었다니까요?”
  “젠장할,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콜록, 컥...”
  “흥분하지 마세요, 상처 덧나요.”
  “콜록, 콜록, 콜록...”

  여자아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의 가슴팍을 눌렀다. 덕분에 소파 위에 축 늘어진 매그너스는 이마를 짚으며 있는 대로 표정을 구길 수밖에는 없었다.

  “대체 무슨...”

  그가 생전 본 적도 없는 텔레비전이라는 기곗덩이 속에서 송출되는 이미지는, 말도 안 되는 이세계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증거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하아.”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쫓기는 신세가 아니게 된 건 좋다, 자유의 몸이 된 것도 괜찮다 쳐라. 어차피 뒤지기 직전이었던 목숨 살아난 것도 그래 좋다 치자. 그래서 내가 이세계에 떨어져 밖에만 나가면 생체실험 당할 외계인이 된 건은?

  “빌어먹을.”
  “뭐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어차피 다쳐서 못 움직이시잖아요.”
  “넌 대체 왜 그렇게 긍정적인 건데? 집에 다 큰 남자를 데려와 놓고 마음이 놓이나?”
  “까불면 댁을 과학자에게 팔면 되니까?”
  “......”

  매그너스는 머리를 싸맸다.

  “그래서 아저씨 이름은 뭔데요? 사람 먹는 거 먹어도 돼요?”
  “내가 짐승으로 보이나? ......매그너스.”
  “뭐야, 아까 말 안 하길래 이상한 이름인 줄 알았는데.”

  일부러 말 안 한 걸 알고도 또 물어보는 걸 보니 성격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매그너스는 미간을 좁히며 얇게 신음했다.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파서 짜증 낼 기력도 안 났다.

  “...네놈이 내 적이면 곤란하니까 말하지 않은 것 뿐이야.”
  “적이 되게 많으신 타입인가봐요?”
  “......뭐, 맞는 말이긴 하지.”
  “하긴 그렇게 생기셨긴 하네요. 제 이름은 르네예요.”
  “화를 내야 할지 이름을 익혀야 할지 분간이 안 가니 좀 하나만 하겠나?”

  르네는 방긋 웃고는 소파에 등을 묻었다가, 옆에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그의 날개를 툭툭 건드렸다. 매그너스가 말이 없자 한 손으로 콱 쥐어보기까지 했다. 매그너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야.”
  “이거 느낌 나요? 신기해...”
  “이건 내 신체 일부다만...”
  “귀엽다.”
  
“......”

  이 녀석 집에 있어도 되는 것일까...

  어쩐지 좀 인생이 힘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