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입드림. 화자=드림주 이름 안 나옴.
* Fate/Grand Order 기반 설정. 자세한 내용 없는 불친절한 글.



  이 세상에 받기 꺼려지는 전화가 얼마나 있을까.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대출 상담, 빚 독촉, 새벽 2시 전남친, 업무 시간 외 전화 등 한둘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인구수만큼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인구수에 2를 곱해야 최소값을 만족하는 답이 나올 거다. 모든 사람은 각자 받기 싫은 전화 한 통씩은 가슴에 품고 살 테니까.
  나는 이 수신차단목록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려 한다.
  항목은 이렇다.
  내 사랑. 특이사항; 기억에 없음.

‌CRAZY
SUCCESSFUL
‌OTAKU

  여기서 기억이 없다는 뜻은 다음과 같다; 필름이 끊겨서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도 아니고, 안 좋게 헤어져 내 삶에 없었던 사람 취급하는 것도 아닌데, 눈앞에 존재는 하고, 그러나 짐작가는 것은 없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이 이런데 어쩔 도리가 있나.
  지금 일어난 일을 그대로 설명해도 말이 안 되는데 당사자인 난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계속 웅웅 울려대는 스마트폰은 잠시 끊겼다가도 바로 다시 울려댔다. 그 덕에 나는 폰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사실 쳐다보지도 못하고 망부석처럼 서있는 와중이었다.
  손도 대지 못하는 상황이 바보 같을지 모르겠으나, 생각해보라. 전화가 와서 발신자를 확인했더니 기억에도 없는 이름이 떠있는 상황을. 심지어 저장명이 어땠는지 기억해보라. 내 사랑이다. 내 사랑. 제정신인가? 카드 결제 내역 안내 메시지를 최애 이름으로 등록을 해놓는 일은 있어도 전화를 걸어오는 상대에게 내 사랑이라는 호칭을 붙인 적은 맹세컨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없다. 영장류에게 붙이기엔 너무 아까운 호칭이란 말이다.
  결국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 여보세요?”
  “……오! 드디어 받았네.”
  그리고 끊었다.
  뭐 시발 뭐? 내가 잘못 들었나? 잘 들은 게 맞나? 내가 지금 들은 목소리가 진짜인가???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란 말인가?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보기엔 혹사당해 열 받은 스마트폰의 열기가 생생했다.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손아귀의 스마트폰이 다시 진동했다.
  내 사랑
  그 세글자를 바라보다 다시 수신버튼을 길게 끌었다. 묘하게 안달난, 그리고 안심한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니 바로 끊으면 어떡합니까. 이렇게 성격이 급해서야 어쩌려고 그러는지.”
  “아 저기, 저희 신문·장판 안 사고요, 다단계 안 할 거고요, 좋은 말씀 안 듣고요, 종교 생활 관심 없고 정수기 집에 있어요. 혹시 법원 전화면 안내문 정리해서 팩스나 메일로 보내주세요 참고로 저희 집에 팩스 없어요.”
  “아니아니 진정 좀 해봐요 좀! 말 좀 합시다!”
  “아니아니 어떻게 진정을 해요 뭐야 이거 음성변조에요 뭐에요 안 알려줄 거면 전화 끊어요 근데 내가 로빈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안 거야.”
  “…….”
  그야말로 죽음 같은 침묵이 도래했다.
  어쩐지 기계 너머의 상대가 어이없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정녕 어이가 없는 건 나였다. 느닷없이 걸려온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았더니 발신자는 오타쿠 라이프의 최애캐였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정확히 똑같은 목소리로? 원작 컨텐츠도 해주지 않은 한국어 패치가 되어서?
  저세상의 오타쿠 이벤트라도 이런 상황은 천지가 뒤집어진 후에나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이런 전개를 쓰면 스토리 작가가 욕을 먹는다. 개인정보를 온갖 곳에 뿌리고 또 뿌려지는 21세기의 사람으로서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보이스피싱(오타쿠 최적화 패치)이라는 설이 개연성이 높았다.
  “댁 말이요…….”
  “아니 이거 무슨 프로그램 쓴 거냐니까요? 나중에 써보려는 거니까 좀 알려줘요.”
  기계 너머의 남자는 지옥보다 깊은 한숨을 쉬더니,
  “현실도피는 그만 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만.”
  했다.
  “지금 완전 현실적인데요. 오타쿠 최애캐 성대 패치를 한 보이스피싱 전화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봐요. 녹음해도 돼요?”
  “녹음이고 뭐고 상관은 없는데 말이죠, 이왕 할 거면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어떠쇼? 보아하니 얘기도 길어질 것 같고.”
  “아 뭔 소리야.”
  머리 위로 찬물이 부어지는 기분이 들면서 술이 깨듯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한국어 패치가 된 최애의 목소리리도 내용히 헛소리면 절로 정색하게 되는 법이었다.
  “저 신체 불량하고 지병 있어요. 술담배 다 해요. 내일 죽어요.”
  “뭔 소리야?! 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쇼! 아무 말이나 한다고 막 해도 되는 게 아니라고!”
  “그쪽이야말로 헛소리 하지 마세요. 로빈 목소리라서 그나마 듣고 있는 거니까.”
  상대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일찌감치 녹음 버튼을 눌러놓길 잘 했다.
  “……그 왜, 번호가 저장되어 있잖수.”
  말없이 액정을 확인했다. 내 사랑. 꿈은 아니군.
  “그런데요.”
  “댁한테 내 번호가 있다는 건 약팔이나 보이스피싱은 아니라는 뜻이잖습니까요?”
  “해킹 아녜요?”
  “내 능력을 높게 쳐주는 건 고맙지만 아닙니다요. 그쪽은 전문 외라서.”
  “그쪽 전문은 뭔데요. 장기매매?”
  “아니라니까! 아…… 특기분야는 헌팅이려나. 추적도 제법 자신있고.”
  상당히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느른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라 의식적으로 뺨을 문질렀다. 입꼬리가 슬슬 올라간 탓이다. 오타쿠의 최애 사랑은 죽을병이다. 와중에 이 정체모를 양반과 캐해석이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 건 지랄병이고.
  “나도 헌팅 대상이에요?”
  “뭐어 그렇다면 그런 셈이죠.”
  쑥쓰러워하는 듯 자신만만하는 듯,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였다.
  “색다른 인신매매 시도였어요. 제 점수는 4점이고요 로빈몫이 4점이에요. 끊을게요.”
  “아니 잠깐만……!!”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터치 한 번으로 뚝 끊긴 통화의 화면을 지우고 주소록을 확인했다. 바로 전화가 다시 걸려왔지만 무시했다.
  내 사랑. 즐겨찾기 등록이 되어있고, 단축번호도 지정되어 있고, 통화기록도 상당 있었다. 문자나 카톡을 한 흔적은 있지만 내용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장르가 스릴러인줄 알았더니 사실은 호러였나보다. 혹시 산치체크를 하거나 부분기억상실이 아닌지 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상황일까?
  일단 진동이 시끄러웠기에 전화를 다시 받았다. 수신자 요금부담 통화가 아니어야 할텐데.
  “네, 여보세요.”
  “…….”
  짜증 혹은 열불 혹은 빡침을 압축하고 있는 모양이다.
  “말하세요.”
  스피커 모드로 바꾸고 다시 핸드폰을 뒤졌다. 뭔가 단서거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아무나 이게 로스트 시나리오가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으러니까,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하다고. 현 상황의 유일한 단서이자 연결고리가 댁인데 말조차 안 들어주면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하잖수. 손뼉도 맞부딪혀야 소리가 나지 않겠습니까요.”
  “와, 저도 폰으로 단서 찾고 있는데 이거 되게 이상하고 찝찝한 기분이네요. 나중에 요금 청구하지 마세요.”
  “환장하겠네.”
  “욕하지마세 아 아니 미친.”
  남자의 놀란 목소리가 뭐라 외쳐댔지만 귀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지금 내가 발견한 것에 비하면 웬만한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리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의문을 내던졌다.
  “그쪽 코스프레 하세요?”
  “코……? 안 하는뎁쇼.”
  “…….”
  “……이봐요?”
  “내 사랑.”
  “하?! 에?! 예?!”
  “지금 어디에요?”
  남자의 말을 귀기울여 들으며 손에 쥔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액정엔 남자의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인위적인 변장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사진이. 내가 더없이 잘 아는, 그러나 처음 보는 남자가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beloved

 ℂℝ

 ‌ “진심입니까? 이게 최선이냐구요.”
  남자는 만나자마자 타박을 했다. 나는 남자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들어찬 테이블과 레일 조명이 낮은 조도로 빛나는 공간. 따뜻한 커피향이 빰을 간질이는 카페. 그리고 푹신한 소파와 달콤한 다과거리.
  “딱 좋잖아요.”
  집에서 멀지 않은 카페를 약속장소로 잡으면 도착하기까지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다. 효율적인 장소 선정이라 할 수 있지.
  “우리가 지금부터 무슨 얘기를 할진 알고 있수?”
  “어……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의를 얻은 난 확신을 갖고 말을 이었다.
  “장기자랑과 새우잡이선을 넘나드는.”
  “진심이요?”
  “반쯤은.”
  미심쩍게 진의를 물어온 남자는 한숨을 쉬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명백한 서양인의 이목구비, 햇빛에 약간 탄 피부, 창문으로 비쳐들어오는 햇빛에 젖어 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칼, 녹색 눈, 굳게 다물린 입술……. 남자의 얼굴에 화장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오묘한 빛깔의 머리칼도 가발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자는 정말로 진짜 같았다.
  대학생에서 사회인을 넘나드는 옷차림새까지 훑어보고 시선을 올리니,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곧은 시선에 내 시선을 일직선으로 맞추었다. 남자의 녹색 눈동자 위로 햇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쏟아졌다. 그늘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관찰은 끝났습니까?”
  “……왜 보자고 했어요?”
  “너무 뾰족하게 굴지 마쇼, 우리 사이잖수? 뭐, 본론에 들어갈 준비는 된 것 같구만.”
  남자는 다소 경박하게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반면 난 등을 곧게 편 상태였다. 외투를 벗지도 않고,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고,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갈 수 있게끔.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습니다요. 편하게 하자고요, 편하게.”
  “초면이잖아요.”
  남자는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치켜뜨더니,
  “먼저 그 부분부터 확인해볼까요.”
  했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로빈 후드이며 한국에 유학 온 외국인이라 한다. 우리는 재작년 8월에 만나서, 썸타고, 사귀고, 헤어졌다가, 다시 사귀는 중이라는, 이른바 연인 관계라는 것 역시 남자의 주장이다.
  “내가 남친이 있다고요??”
  “눈앞에 있잖수.”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친이랑 1년을 사귀었다고???”
  “그런 셈이구만.”
  “나도 모르는 남친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1년을?”
  “다음 얘기로 넘어가도 될랑가요.”
  남자가 말하길 그는 칼데아의 기억이 있다고 한다. 인리소각의 위기를 맞이한 인류 최후의 마스터에게 소환되어, 있는 힘껏 발버둥치다 결국 인리수복을 일궈낸 경험을, 간접경험을 한 형태로 기억한다고 했다. 예컨대 영령이 다른 시간대, 혹은 차원의 또 다른 자신이 겪은 경험이나 사고를 기록으로서 알고 있는 것처럼 남자 또한 그렇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가 말한 칼데아의 기록은 내 기억과 일치했다.
  즉 남자의 말을 전적으로 신용한다는 전제 하에, 그는 로빈 후드이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로빈이라는 뜻이었다.
  “끝부분이라거나 군데군데 기억이 애매모호하지만요.”
  “내가 인리수복하고 탈주한 탓이려나.”
  “마스터가 없어진 칼데아가 그대로 공중분해 된 걸지도 모르죠.”
  “우주를 표류한다고 해줘.”
  “어떻게 포장해도 결과는 같다고 생각하지만, 뭐 상관 없나.”
  중요한 건 이 부분입니다요, 하고 남자가 운을 띄웠다.
  “당신이 내 마스터고, 내가 당신의 서번트라는 사실.”
  남자와 내가 오늘, 지금 이 순간 처음 만남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서로에게 서로가 마스터와 서번트로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설령 다른 차원에 위치했을지라도 한번 이어졌던 연결이 현재의 상황을 초래했을 것이라고, 남자는 자신의 추측을 읊었다.
  “현재의 상황이라 함은.”
  “내가 여기에 있는 거죠. 마치 원래 존재했던 사람처럼. 말이 안 되잖아요? 원래대로라면 댁과 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일은커녕 존재 자체도 인식하지 못했을 테니까.”
  담담하게 나열되는 문장에 난 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맨손 위로는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는 령주가 나타난 적은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내가 여기로 와버렸고,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단 말이죠. 얼굴 없는 왕이 몰래 숨어들기에 최적화가 되어있긴 해도 이런 경우까지 통용될 만큼 만능은 아니라고.”
  “이 사실을 언제 알았는데? 그러니까,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언제 눈치챘는데?”
  “얼마 안 됐수다. 사흘, 아니 나흘 정도려나. 현대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은 다 갖고 있으니 적응하는 데에 괴리감은 없었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건 시간이 조금 걸렸지.”
  “난 전혀 몰랐어…….”
  “보면 압니다요, 그런 건. 아마 내가 건 전화를 댁이 받으면서 이 상황이 완벽하게 마무리 된 게 아닐까 싶은데.”
  정리하자면 로빈은 여기로 완전히 넘어온 것이 아니라 괴리감을 느낌과 동시에 나와 단절되어 있었지만, 그가 건 전화를 내가 받음으로써 차원이주가 안정되고 나하고도 연결이 이어진 게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마력 패스도 연결되어 있으니, 댁이 내 마스터요. 일단은.”
  “그치만 나 령주가 없는데.”
  “그야 난 수육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어엿한 신분도 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과거도 생겼고. 완전히 차려진 밥상이랄까.”
  난 퍼부어지는 정보에 파묻히지 않게끔 발버둥쳤다. 그의 설명은 내가 어느 정도 알 것이라는 전제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것이라는 태도가 미약하게 깔려있어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뭔지도 모를 계약서에 그대로 지장을 찍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내 나름대로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떠오르는 의문을 그에게 던졌다.
  Q. 그럼 성배전쟁에 참가하게 될지도 모르는 거야? 나 목숨 걸만큼 간절한 소원은 없는데 어떡하지. 그냥 소소하게 로또 1등이나 연금복권 당첨이면 충분한데.
  A. 댁 소소하다는 게 뭔지는 아쇼? 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전쟁은 없고 성배도 없으니까. 그냥 내가 여기 있을 뿐이야.
  Q. 이거 전정사상 아냐? 왜곡된 역사 아냐??? 표준 세계선에서 벗어나버린 거 아냐 이러다가 수복되는 거 아냐???
  A. 그러니까 좀 진정하라고! 굳이 말하자면 성배에 ‘내가 당신 곁에서 문제 없이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 결과랑 비슷한 게 아닐까 싶걸랑요.
  Q. 누가……?
  A. 그러게 말입니다~ 누굴까요~
  긴 설명과 답변을 끝낸 로빈은 지쳤는지 소파에 등을 깊게 묻었다. 나는 찡그린 미간과 햇빛이 스치는 코끝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딜 보나 완벽히 여기 사람처럼 보였고, 동시에 로빈 후드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물결치는 보리밭처럼 금빛 머리칼이 햇살에 반짝이며 부서질 때만큼은 현실에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또한 그가 현실과 비현실 어느 쪽에 속해 있든(혹은 중간에 걸쳐있든) 그는 명확하게 잘생긴 생김새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구만요.”
  음료로 목을 축이던 로빈이 다소 공격적인 웃음을 지었다.
  “지금 내가 잘생겼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말하는 로빈 후드는 확실하게 잘생긴 낯짝이었다.
  “설마, 염화念話라거나 텔레파시로 알았다는 말은 하지마.”
  “댁이 표정관리를 못할 뿐입니다요. 염화는 불가능한 거 같으니─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유를 모르겠는 건 한두가지가 아니니까요─걱정마쇼.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진중한 표정으로 몸을 가까이 하는 로빈의 모습에 덩달아 표정이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칼데아를 왜 탈주했느냐, 하는 질문이 날아온다면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그야 그건 게임에 불과했으니까. 눈앞에 나타난 그에게 할 대답으로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어, 응. 뭔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엥?”
  “엉? 아니, 내가 여기로 왔고, 더군다나 댁하고의 관계도 생겨버렸는데 당사자로서 이렇다 할 감상이라든가 의견이 있을 거 아뇨.”
  “어? 아니, 딱히……. 아직 현실이라는 느낌이 안 든달까, 반신반의하달까, 조금 얼떨떨한 상태라, 음, 미안…….”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댁도 말려든 상황이라는 건 변함없고.”
  로빈은 담백한 대답을 남기고 몸을 물렸다. 착각일지도 모르나 차분함을 넘어 시무룩함이 엿보이는 표정에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저, 저기, 로빈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돌아가고 싶다거나, 없던 일로 하고 싶다거나 그래? 어? 그럼 어떡하지? 나 못 돌려보내줘.”
  “댁이 물어봐놓고 당황하지 마쇼, 나 참. 그리고 돌아간다고 해도 돌아갈 곳이 있긴 하려나 모르겠네요. 칼데아는 그렇게 되었으니. 여기에서의 고향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의 대답에서는 칼데아를 박차고 나온 과거의 잔재와 죄악감이 흠뻑 묻어났기 때문에 난 그렇구나, 따위를 웅얼거리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는 댁이요. 마스터는 댁이잖수. 서번트는 충실히 따를테니 싫다, 좋다 같이 간단한 의사표현이라도 말해봐요.”
  “아니 내 의사를 물어봤자…….”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소용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로빈의 눈빛이 제법 매서운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웃음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음, 아직 몰래카메라나 사이비 전도 수법이라는 가능성도 놓지 않고 있긴 한데.”
  “댁 진짜 끈질기구만.”
  “2차원 출신이 할 말이 아닌데요.”
  “그렇다 치고, 소감은?”
  “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색한 미남의 박력에 밀려 속내가 냉큼 굴러나왔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다른 차원에 살던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 말을 걸어오는데 의심을 하더라도 싫다고 말 할 사람이 많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현실에 나타난 로빈 후드를, 그것도 나의 로빈을 외면할 수 없었다.
  “로빈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쓰이고, 걱정도 되고, 솔직히 꿈이 아닌가 계속 의심이 들지만. 네가 로빈이라면 정말 좋을 거야.”
  “……그렇다면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꿈이네요.”
  그는 내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마디가 두드러진 손가락이 눈앞을 잠시 어른거리다 움츠러들었다. 난 갈곳 잃은 손끝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크고, 따뜻하고, 굳은살이 배겨있어 딱딱하고, 그러나 부드러운 사람의 살갗이었다.
  “진짜구나.”
  “그럼요.”
  “살아있네.”
  “그렇죠.”
  “……당신과 만나서 기뻐.”
  내 작은 속삭임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숨결이 힘없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당신과 만나고 싶었어.”
  침묵하던 로빈은 내 손을 맞잡았다. 내리깐 금빛 속눈썹에 햇빛이 맺혀있었다.
  “……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