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꿈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일이 현실인지 꿈인지 결정하는 건 자신의 몫이다.

  학기 중부터 하던 아르바이트를 방학에도 이어나갔다. 해가 정수리 위를 지나 오른쪽으로 반쯤 내려가는 시간에 출근해서 달도 뜨고 별도 보이는 시간에 퇴근을 하는 생활을 이어나간지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때면 통장 잔고를 확인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했담. 이번 달에 예약한 굿즈가 몇 개더라.... 요루미는 제 뺨을 가볍게 쳤다.
  ‘노래의 왕자님’, 통칭 우타프리. 요루미가 고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에 ‘거하게’ 치여서 대학을 입학한 후로도 계속해서 치이고 있는 장르였다. 후배조, 선배조, 선생님조, 헤븐즈까지 총 20명의 캐릭터 중에서도 잇토키 오토야는 매년, 매주, 매일, 상시로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아!! 진짜 쩐다 이거..... 미친 거 아니야? 하..... 진짜....”

  .... 어제 신 일러스트가 떴는데, 그 경이롭고 아름다운 모습에 요루미는 어제부터 퇴근길을 탭댄스로 밟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함께 뜬 굿즈 라인업에 통판으로 살 건 이미 다 정해놓았다. 이렇게 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 못 두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눈물을 몇 백번 흘리고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최애캐에게 인생을 잡힌 인생이란. 그래도 잘생기고 귀엽고 아름다운 얼굴을 계속해서 볼 수 있다면 괜찮은 일이다.
  오전에 택배로 받기만 한 굿즈를 제대로 볼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져 어느새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사실 빨리 굿즈존을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침대 머리맡에 나둔 누이구루미를 품에 안고 잘생기고 귀여운 오토야가 그려진 소중한 드림 쿠션 옆에 누워 얼굴감상(?)을 하다보면 저세상 천국이 부럽지 않았다.

  “음? 내가 불을 키고 나갔었나?”

  쉴 생각만 하다 방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방문 앞에서 겨우 발견했다. 기억을 다급하게 더듬어 보면, 그런 기억은 없었다. 설령 불을 켰다고 해도, 나갈 때 끄고 나갔을 터인데. 엄마나 아빠가 왔나? 요루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방문을 열었다가, 일 년치 하고도 세 달치의 비명을 모조리 질러버렸다.

*

‌  너무 놀란 바람에 눈물과 함께 나온 콧물을 옷 소매로 대충 닦은 요루미는 제 앞의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와. 진짜..... 잘 생겼다....

  “나 보고 한 말이야?”

  속으로만 생각한 말이었는데 입 밖으로 나왔나보다. 그렇지만 진실인걸. 요루미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생기기만 하겠어요?? 잘 생기고, 엄청, 켁!”

  잔뜩 흥분해서 말한 것 때문인지 사례가 들었다. 한참을 괴롭게 켁켁 거리다가 진정이 될 때쯤에야 요루미는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고개를 드니 잘생긴 사람이 눈 앞에…. 아아.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잘 생긴 사람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면 없던 마음도 생기지 않을까요.

  “엄청?”
  “귀엽다고요!”

귀엽다는 말에 표정이 좀 묘하게 변하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요루미의 눈엔 귀여웠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최애캐인 잇토키 오토야가 틀림 없을 것이다. 침대 머리맡에 있던 누이구루미를 어정쩡하게 들고 있어서 오타쿠 집에 들어온 운이 없는 멍청한 도둑인 줄 알았다가 제정신을 부여잡고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순간, 상대방이 든 누이구루미와 똑 닮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과 누이구루미를 번갈아 보자, 상대방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진짠가?

  “.....잇토키 오토야….?”
  “내 이름이 맞긴 한데….. 그게….”

  상대방, 잇토키 오토야가 굿즈존을 흘끔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보다도 지금 저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요루미가 알고있던 그 목소리가 맞다! 몇 번을 듣고 들었던 음악과 게임 속에서 들었던 다정하고 따뜻한, 행복한 목소리가 지금 전자기기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색한 미소임에도 예쁘게 호선을 그린 입매ㅡ요루미는 그것까지 예쁘다고 느꼈다.ㅡ 에서 나오는 말이 귓가를 세차게 때렸다. 이제 진짜 현실이 맞나요. 요루미는 제 뺨을 가볍게 쳤다. 아픈 걸 보니 현실이 맞나보다. 현실이 맞…..

  “근데 이것도 전부 나야?”

  오토야가 가리킨 것은 흘끔 봤었던 굿즈존이었다. 모든 장르에서 거의 기본적으로 나오는 아크릴 스탠드는 나오는 것 마다 구매해서 수많은(?) 오토야가 책장에 서 있었다. 시리즈별로 나온 스트랩들은 코르크판에 줄을 맞춰 가지런히 나열되있고, 쿠마ㅡ곰인형ㅡ 역시 줄을 맞춰 시리즈별로 책장 앞부분에 앉아있었다. 제일 가장자리에는 프린스캣ㅡ고양이 인형으로 빨간색 털에 목에는 깜찍하게 빨간색 리본을 달고 있었다.ㅡ이 귀여운 포즈로 앉아있었다. 그것말고도 많은 종류의 굿즈들은 하나같이 오토야가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당사자가 신기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와아…. 내가 정말 많네. 음, 혹시 너도 내 …. 팬이야?”
  “팬…..이 맞지 않을까요?”

  팬이자 엄청난 오타쿠에요,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저 얼굴을 앞에다가 두고 자기 소개로 오타쿠라 하기에는 너무 잘 생긴 얼굴이었다.

  “게임 속에 나오는…. 분,을 좋아하고 응원하는거니까 팬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 마음은 오토,아,아니 잇토키군이 원래 있던 곳….. 에 계시는 팬분들과 똑같으니까요.”

  평소대로 이름을 부르려다가 급하게 호칭을 바꿨다. 어느 날 눈 앞에 나타난 최애캐에게 다짜고짜 온 세상 친한척, 아는 척을 하기에는 요루미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 쎄게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잘 생겼어요. 그리고 귀여워요.
  홀린 듯이 또 같은 말을 내뱉었다. 사실인 걸 어떡하겠는가.

*

‌  오늘 아침에는 발렌타인 데이를 맞이해서 초콜릿을 만들 예정이었다. 물론, 혼자 만들 예정이었고 너무 조용하면 흥(?)이 나지 않으니, 음악을 들으며 혼자만의 흥을 감추지 않은 채로 할 예정이었다.
  초콜릿 재료는 전날 오전에 일찍 일어나 사온 것이었고, 오늘은 오전 일찍 일어나 오토야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카레를 만들었다. 쓸데없는 정보지만, 오토야는 카레 중에서도 치킨이 들어간 것을 제일 좋아해서 일어나자마자 닭고기를 사와서 만들었다. 아. 내가 직접 만든 걸 먹는 최애라니! 마음 같아선 집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사람들! 제 최애가 제가 만든 음식을 제 눈 앞에서 먹어요! 그리고 오토야가 행복해하는 표정이란, 이런 표정을 평생 볼 수만 있다면 간이고 쓸개고 콩팥이고 모조리 바칠 수 있을 정도였다.

  행복한 아침식사를 뒤로하고 전날 사왔던 재료들을 꺼내자 곁을 기웃거리던 오토야가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을 만드는 거야?”
  “아, 네! 친한 사람들 거 몇 개만 만들려구요!”
  “재료가 이렇게 많은데 남지 않을까?”
  “후후. 그건 제가 다 먹으면 되는 거죠!”

  초콜릿은 우정 초콜릿이다. 같이 일하는 알바생들과 매니저, 점장의 것만 만들고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오토야에게 바치고ㅡ라고 해봤자 굿즈존 앞에 나두는 것과 누이구루미와 드림쿠션에게 주는(?) 것이었다.ㅡ남은 건 냉동실에 뒀다가 먹고싶을 때 마다 야금야금 먹으려고 했었다.
  
  “잇토키군도 만들어 볼래요?”
  “직접 만들어 본 적은 없는데 괜찮을까?”
  “괜찮아요! 저도 처음엔 그랬는걸요. 그리고 저도 사실 잘 만드는 건 아니에요.”

  요루미는 씨익 웃으며 물이 담긴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었다. 같이 만들 수 있어
  기쁜표정이었다. 냄비에 불을 올린 후, 큰 볼에 커버춰 초콜릿을 담았다.

  “하나는 다크로 할 거고 하나는 밀크로 할 건데 어떤 걸로 만들어 볼래요?”
  “음….밀크로 해 볼래! ”

  오토야는 초콜릿이 담긴 볼을 냄비 위에 올려두었다. 곧 부드러운 밀크 초콜릿의 향이 올라와 코끝을 간지럽힌다. 오토야가 초콜릿을 휘휘 저으며 말을 걸었다.

  “아, 맞다! 그, 말하는 거 말인데... 편하게 해도 좋아.”

  이게 무슨 소리람? 초콜릿이 잘 녹는가 보고있던 요루미는 잠깐 생각의 끈이 끊어져 제 앞의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아. 분명 이 사람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데 왜 올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오토야가 부끄러운건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저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하느님,부처님. 이게 정말로 무슨 일일까요…. 요루미는 제 뺨을 양 손으로 가볍게 쳤다. 어제부터 계속 몇 번이나 이러는 지 모르겠다. 눈앞의 현실이 너무 행복해서 현실이 맞는 지 확인하려는 행동이었다. 살과 살이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와 촉감은 생생해서 꿈은 정말로 아닌 것 같았다.

  “말도 편하게 해도 괜찮고… 잇토키군 말고 오토야,라고불러줄 순 없어?”
  “제,제,제,제가요?!”

  세상에. 세상 어느 말보다도 더 충격적일 수가 없다! 요루미는 그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그래도 될까요!! 마음 속으로는 벽을 부수고 지구를 부수고 온 우주를 부수는 중이었다. 마음만은 말이다.

  “아니요!! 아니요!! 저는 지금이 더 편해요! 정말로!”

  손을 과장되게 공중에서 붕붕 거렸다. 요루미의 손짓에 놀란 것인지 오토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이 깜짝 놀란 아기 강아지 같았다.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건지! 앞으로 더 착하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볼에서 다 녹은 초콜릿이 눈에 들어왔다.

  “다 녹았네요! 그 다음은…”

  미리 데워 둔 생크림과 버터를 초콜릿과 섞은 뒤, 틀에다가 평평하게 붓고, 두 시간 정도를 냉장고에서 굳히면 거의 완성이다. 남은 일은 초콜릿을 예쁘게 자르고 포장하면 끝이다. 요루미는 고심해서 사온 포장지를 꺼냈다. 빨간색 하트 무늬가 귀엽게 박힌 것이었다.

  “두 시간 뒤에 또 일해야 하니까 충분히 쉬어두세요.”
  “그 정도 버틸 체력은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정말 체력이 좋긴 좋나보네요! 그건 좀 부럽다. 과자라도 좀 드실래요?”
  “괜찮아! ….. 어…”

  대답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요루미는 이미 과자를 가지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닭고기를 사러 가는 길에 샀던 초코 과자였다. 오토야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부디 먹어달라며 눈빛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과자를 두 개째 먹고 있을 때, 오토야는 히죽히죽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요! 생각했던 표정이 그대로 보여서 너무 귀여워요!”
  “남자에게 귀엽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아?”
  “남자든 여자든 귀여우면 귀여운거죠! 잘 생기고 귀여운 거니까 걱정마요. 아. 점심 드실래요? 카레….음, 두 끼 연속으로 카레라이스는 그런가? 카레 돈까스도 좋아하시나요?”

  맛있는 걸 잔뜩 먹이고 행복해하는 표정을 눈앞에서 꼭 보고싶었다. 모든 할머니들의 마음이 이런건가. 그래서 항상 먹을 걸 내오시는 걸까. 요루미는 할머니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용한 기구들을 씻고, 정리한 뒤 간만에 시간이 나 간단하게 청소를 하려 했으나, 강아지같이 귀여운 최애를 앞에 두고 청소같은 짓은 헛짓이다. 그래서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헐레벌떡 달려와 오토야의 맞은 편에 앉았다.

  “저, 하고싶은 말이 엄청 많아요!”
  “응? 뭔데?”

  오토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장이 발등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 살아있는게 이상할 정도다. 심호흡을 한 요루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짜, 너무, 잘 생겼고 귀여워요.”
  “흡.”
  “왜요. 왜 웃는거에요. 전 진지하다구요!”
  “너한테 이 얘기만 여러 번 듣는 거 같아.”
  “아무도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나요?”
  “음…. 으응. 그렇네. 딱히 없는 것 같기도....”

  딱히 없다고? 요루미는 부정이라도 하는 듯 코를 찡그렸다.

  “다들 눈이 잘못되었나 보네요! 이렇게 잘 생기고 귀여운 남자가 어디 있다고! 덧니조차도 귀여운데! 그런데 몸은 또 좋아, 반전에 목소리는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죠! 그리고…”

  최애캐 앞에서 최애캐 자랑을 하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에이사카 요루미는, 초콜릿이 냉장고 안에서 굳을 동안과 초콜릿을 포장하는 동안에도 자랑을 계속 이어나갔다. 분명 거기까지는 확실하게 기억이 났었다. 오토야가 옆에서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짓는 것 역시 기억이 났었다.

*

‌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초콜릿을 포장하다가 잠이 든 이상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손을 쓰다가 잘 수가 있죠? 라는 물음을 누군가가 한다면 제가 그런데요, 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힘을 좀 더 내서 고개를 드니, 온 사방이 깜깜했다.

  “미친…. 미쳤다….”

  대낮부터 잠이 든 것도, 그 잠을 깜깜해질 질때가지 이어간 것도. 한숨을 푹푹 쉬며 옆 자리에 있을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아무도 없던 것처럼.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요루미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것만을 쳐다보았다. 원래 아무도 없던….

  “.... 머리 아프다.”

  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옆자리에다 시선을 고정하고 말을 뱉었다. 물론,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머리가 아픈 것은 꿈같은 일이 진짜 같아서, 진짜 같은 일이 꿈같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포장된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달콤함에 턱이 당길 정도로 아파왔다. 집 안이 조용했다.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갔나. 요루미의 방이나 화장실이라던가. 아니면 원래 있는 곳으로라던가. 왠지 요루미는 후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입 안에 맴도는 달콤함이 싫다. 물이라도 마셔서 없애야할 듯 했다. 일어나서 뒷정리도 하고 간만에 남은 쓰레기도 버려야 했다. 할 일이 꽤나 있는데도 요루미는 포장지를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꿈 같던 현실이, 현실 같던 꿈이 입 안에 맴도는 달콤함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