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 카뮤 걸렸네

‌  이야기의 시작은 늘 눈 내리는 겨울날 아무도 없는 산 속을 혼자 걷는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저 너머 어둠 속을 두려워하며,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위로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간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망할, 이놈의 촌은 도대체 길이 생기지가 않아. 정부 놈들은 세금을 받아서 도시만 개발하지 이런 촌마을은 신경도 안 써줘요. 투덜거리면서 정부 욕을 하고 있으면, 발도 아주 푹푹 빠진다. 올 겨울은 기록적인 한파라며 뉴스가 한참 시끄럽다.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간 덕분에 음식을 냉장고 밖에 두는게 낫다지? 이러다가 얼어죽을지도 모른다고 투덜거리면서 조용히 발을 재촉한다. 빠른 길이니까 선택하긴 했지만 멍청한 판단이었다. 산은 해가 빨리 진다. 분명 들어 올 때만 해도 훤한 대낮이더니 벌써 사방에 어둠이 내리고 있다. 밤의 산은 위험하다. 어릴적부터 놀이터 삼아 돌아다녀 손바닥 보듯 훤한 산이지만, 눈내리는 밤의 산은 특히나 위험하다. 어떻게 이렇게 기술이 발전해도 전파가 안 터지냐. 치밀어 오른 두려움을 툴툴거림으로 가려가며 걸음을 재촉한다. 짐짓 의연한 척 해보지만 사방에 내려앉은 어둠이 두렵다. 저 너머에 누군가 있다면 어쩌나? 차라리 죽은 것이 낫지 산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바로 그 때, 신음 소리가 들렸다.
  다른 동물의 것이라 우길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 어쩌지? 순식간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구해야 할까? 누가 이 밤중에, 그것도 눈 오는 산에 다친 사람이 있어? 하지만 조난자면? 그러면 그냥 119를 불러주면 되지 않나?

  “だす、けて…….”

  망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린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 연기면 어쩌지? 불안이 잠시 머리를 스치지만 사라진다. 불안하지만 불길하지 않다. 내 감을 믿어야지. 설령 틀렸더라도, 두고 간다면 두고두고 후회한다. 멍청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소리쳐 부른다. 희미한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진다. 제발 그대로 있어줘, 포기하지 말아. 닿지 않을 기도를 간절하게 올리며 눈 내리는 산속을 정신 없이 뛴다. 다급하게,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찾아낸 조난자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가장 먼저 찾아든 것은 경이. 사람의 얼굴에서 경이를 느낄 수도 있구나, 하고 희미한 이성으로 생각한다. 눈 속에 사람이 누워 있다. 맨 살을 드러내고. 도대체 상의는 어디로 갔는지, 왜 양말은 없는데 신발은 정장 구두인지. 그런 사소한 것들을 신경쓰는건, 고백하건데 그 사람을 집에 데려다 놓은 이후의 일이었다. 흰 눈위로 흩어진 옅은 색의 금발과 그와 같은 색의 속눈썹은, 음, 개안하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아, 인간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고. 물론 그 다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씨발, 이 밤중에 왜 사람이 웃통 까고 눈 밭에 누워 있어?!”
  다급하게 흔들어 보지만 체온이 낮다. 주변의 눈이 녹고 몸 위에 물기가 있는 걸로 봐서는 여기 꽤 오래 있었다. 시체는 아니다. 숨은 쉬고 있지만 의식은 흐릿하다. 오늘은 밤새 눈이 내릴 예정이고, 도로는 막혔다. 여기서 답은 하나.
   우리 집에 데려가는 것 뿐이다.

  “미치겠네, 이게 무슨 일이야.”

  저기, 괜찮으세요?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다급하게 묻지만 희미한 신음소리만 흘린다. 일단 옮겨야겠지. 이대로 두면 동상 걸려서 피부에 문제 생기거나 얼어 죽기 십상이다. 저 완벽한 미모에 흠집이라도 났다가는 인류의 유산을 망쳤다는 죄책감으로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으리라.
  “일단 급한대로 이거라도 입으세요. 이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 제 고향이거든요. 저희 집에 가면 갈아 입을 옷이랑 대충 처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何を……言っている…….”
  “당신 살려주겠다는 소리입니다. 아, 貴方を助けてあげる、と言っています.”

  입고 있던 롱패딩을 벗어 걸쳐준다. 옷을 벗자 몰려오는 한기가 절로 몸을 떨게 만들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눈이 내리는 길, 휘청거리는 정체 불명의 미인을 부축해 나아간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건, 상대가 누구든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사실 정도. 아 근데 저거 롱패딩 아니었어? 기장이 왜 저렇게 짧아졌냐?
  이야기의 시작은 늘 눈 내리는 겨울 날 아무도 없는 산속. 이야기의 장르가 스릴러일지, 로맨스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다음 장면을 향해 나아갈 뿐. 우리는 흰 길 위에 찍히는 발자국이 늘어났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눈 내리는 밤의 시골 마을은 늘 조용하다. 겨울은 농한기, 농사를 지어 벌어먹는 우리 동네는 시끄러울 일도 없다. 어둠이 내려앉아 달과 별이 하늘을 수놓아 잔잔한 곳. 분명 그래야 할 밤이 오늘은 지독히도 소란스럽다.

  “도대체 너는 누굴 데려온거야?”
  “몰라! 사람이 죽어가는데 어떻게 놓아둬?”

  어머니는 딸내미가 데려온 남자를 보더니 기겁하셨다. 하지만 아픈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급하게 물을 데우고 젖은 옷을 벗긴다. 잘생긴 청년의 옷을 벗기고 있지만 이미 차갑게 얼어버린 피부를 만지고 있으면 부끄럽다기 보다는 벌써 동상으로 피부가 괴사했다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욕조를 가득 채운 뜨거운 물에 거즈를 적셔 열심히 체온을 올려주고 있으면 힘 없는 팔이 미미하게 떨리는게 느껴진다. 옅게 얼굴을 찡그리며 내뱉는 말이 되지 못한 신음에 대답하며 팔을 도닥인다.

  “大丈夫です, 身体を温めるだけですから. ちょっと我慢してください.”

  묘하게도 영어보다 일본어에 반응이 좋다. 아무리 봐도 영어나 유럽쪽의 언어를 쓸 것 같은데, 바로 옆 나라 언어만 알아듣고 있는 꼴을 보면 기분이 좀 묘하다. 그러니까, 일본의 국뽕가득한 영화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하나.
  헉, 설마 나 인종 차별하고 있나?
  머릿속에 떠다니는 이상한 생각을 이리저리 쫓아내면서 이미 차가워진 손발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감싼다. 병원에 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 고립된 마을에서 내가 할 수 있는건 이렇게 응급처치와 함께 기도하는 일 뿐이다. 제발, 이 사람이 죽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밤은 깊어간다, 사람의 목숨을 위해 분주하게 뛰며 우리는 기도한다. 제발, 제발.

  아침의 차가운 햇살이 온 마을을 비추고 옆집의 닭이 소리 높여 울어댈 무렵,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새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닦고, 뛰고, 정신을 잃지 말아달라고 말을 걸었다. 다행이도 청년은 우리의 노력에 보답했고, 송장 치울 일은 안 생겼다. 여기까진 해피엔딩인데.
  저체온증의 후유증인지, 말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건지 몰라도 청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왜 눈 내리는 산 속에 옷을 벗고 치명적으로 누워 있었는지, 원래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 생각이었는지 하는 것들.
  사실, 누가 들어도 수상한 대답이다. 누가 그런 말을 믿겠어. 제대로 전파도 안 터지는 산 속에,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누워있는 아름다운 청년이라니. 영화에 나와도 식상해서 욕먹을 소재다. 그럼에도 딱히 추궁할 마음도 들지 않았던 이유는, 역시 저 얼굴 탓이다. 현실감 없는 말이라고 화내기엔 저 얼굴이 더 현실감 없다. 누가 알아, 아틀란티스에서 왔을지.

  “[그러면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머물 곳은 있습니까?]”
  “[……없다.]”
  “[……혹시 돈은 있습니까?]”
  “[…….]”

  염병할. 얼굴이 예쁘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신원 불명의 불법 체류로 추정되는 외국인을 조금 있으면 마을이 고립되는 시기에, 집에 들였다는 소리군.

  “이건 또 무슨 개같은 상황이야…….”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 번 데려온 사람을 내다 버리는 취미는 없다. 게다가 저렇게 예쁜 얼굴인데 한국어 한 마디도 못하는 인간을 아무데나 버리면 새우잡이 배나 어디 위험한 곳으로 팔려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책임은 져야지. 하지만 어떻게?

  “[일단 사정은 알겠습니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게 떠오를 때 까지는 여기서 묵는게 좋으실 것 같네요. 잠시 기다리세요, 밥 가져다 드릴테니까.]”

  어쨌든 환자는 환자다. 아무리 하루만에 멀쩡하게 털고 일어섰다고 하지만, 눈 내리는 밤 산 속에 누워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밥을 굶으면 안 되지. 일어서는 그를 손짓으로 만류하고 가볍게 상을 차린다. 등 뒤에서 어머니가 기지배 즈그 아버지도 그렇게 안 차려 주더니! 하고 소리치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고기를 굽는다. 사람이 잘 먹으면 뭔가 생각이 좀 나겠지.

  상을 차려주고 나면 조금 이성이 돌아온다. 정말 버릴 수 없으니 떠맡기로 정했지만, 말 그대로 ‘떠맡았’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앞이 막막하다. 이 좁은 동네에 젊은 청년이 새로 들어오면 소란스러워지는 건 당연지사. 더군다나 마을에 하나 있는 젊은 사람인 내가 데리고 들어왔다면 두배가 뭐야, 열댓배로 시끄러워진다. 그러니까 깐깐한 어른들을 납득시킬만한 이유를 대지 않으면 오만 소문이 창궐할텐데. 마땅한 해답을 못 찾겠다. 하아, 일단 어머니부터 납득 시켜드려야 할텐데.
  사실 아까부터 어머니의 얼굴이 그다지 좋지 않다. 뭐, 놀랄 일도 아니다만. 결혼 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겠다고 못을 땅땅 박아놓은 딸이 어디서 남자를, 그것도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잘생긴 청년을 데리고 왔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저 사람, 그러니까─ 아. 이름을 안 물어봤네. 편의상 칭하기를 이름 모를 잘생긴 청년이 데려올 때 쓰러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사이좋게 집 밖으로 쫓겨났을게 분명하다. 으으, 쫓겨나기라도 했어봐. 도시에 나갔더니 잘생긴 청년이랑 결혼해서 돌아왔냐고 쪼아대는 어른들 등쌀에 온 마을 돌면서 인사하고 잔치하고 애는 언제 낳을거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차라리 그냥 산을 반대로 넘어갈 걸 그랬나…….”

  그랬으면 병원에 맡길수 있었지. 나중에는 신원을 증명해야 할 테고, 기억도 없는 사람 신원은 어떻게 증명하지? 문득 현실적인 문제가 치고 올라온다. 저 사람이 정식 비자가 있나? 아니 있다고 해도 기억은 하나? 일본어를 쓰는 걸 보면 일본에 귀화한 외국인일지도 모르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다시 머리를 꽉 채운다. 일단 봄만 되면 저 사람을 데리고 나갈 수 있는데, 겨울 방학에는 꼬박 여기 있어야 한단 말이야.
  하아……. 이 좁고 씨족사회인 마을에서 저 사람의 신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인데.
  거대한 현실이 나를 덮쳐오는 그 순간, 방문이 스윽 열렸다. 그리고 바깥을 내다보는 저 인간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 저런 얼굴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밖에 던져둘 수는 없다. 거대한 사명감이 몸을 지배하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입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 우리 결혼할래요?]”
  “[하아?]”

  이건 내 인생 다시 없을 아름다운 사람과 내가 계약결혼을 시작한 이야기이다.

  회고해보자면, 분명히 그 순간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심신미약이나 뭐 그런 상태로 취급해 줘야 한다고. 내가 한동안 남편이라고 소개하게 된 사람, 그러니까 카뮤 ─이름은 나중에 들었다.─는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름답다? 잘생겼다? 어떤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과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미모를 알 수 있다. 이는 이 작은 농촌마을에서 자라 저주받은 한국에서 삶을 영위하는 내게는 과한 자극이고, 그의 얼굴만 보면 이성적으로 사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다행스럽게도 그건 이 마을에서도 똑같았다.
  내 남자보는 눈의 기틀은 이 애증의 고향마을에서 다졌고, 그건 이 마을에 잘생긴 사람이라고는 눈을 강물로 씻고 말린다고 공기놀이를 한 다음에 봐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 곳에 저런 미인이 떡하니 들어앉아서 생글생글 웃고 다니니 어땠겠나. 나의 자랑스러운 신원 불명자 계약 남편께서는 이사 삼일 만에 이 마을을 정복하는 쾌거를 이루셨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다 못해 동네 발발이까지 카뮤를 보면 꼬리를 치면서 뛰어와서 배를 까뒤집는다. 저 새끼, 저거저거 내가 육포를 산처럼 가져다 바쳐도 아는 척도 안 하더니. 온화한 얼굴로 동네 발발이 ─이름은 많다. 나는 편의상 백구라고 부르는데 옆집에서는 뽀삐라고 부르더라.─를 쓰다듬는 카뮤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복한건 좋은데,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겼다.

  “아니, 글쎄, 저 파란 지붕 아랫집네 딸이 남편을 사 왔다며?”
  “그래? 처음 듣는데.”
  “왜 처음 데려온 날도 방에 가둬놓고, 그 뒤로도 밖에 잘 안 내보내잖아. 그게 도망갈까봐 그런거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건실하고 잘 생긴 청년이 왜…….”
  “모르는 일이지. 하여튼 안 됐어.”

  이런 거.

  “청년……. 카뮤라고 했던가? 어려운 일 있으면 꼭 말혀. 내 비행기 표 정도는 사줄수 있응께.”

  아니면 이런 거.

  “으이그……. 하여튼 안한다는 놈들이 제일 지독혀. 남편이 없으면 없는거지 어디서 사람을 사 와 사람을.”

  이런 거라던지!
  아주 돌아버리겠다. 카뮤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건 좋은데, 이제 나를 향한 의심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아무리 부정을 해도 듣질 않고, 카뮤는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나 가벼운 인사 정도만 가능하니까 알아듣질 못하고 예쁘게 웃고. 웃는 얼굴을 보면 저런 청년이 뭐가 모자라서 나랑 결혼했냐며 다시 오해가 번진다. 아니라고 소리도 쳐 보고 화도 내 보고 하다 못해서 어머니에게 나 대신 이야기 좀 해 달라 아무래도 어른의 말을 더 믿지 않겠느냐 하소연도 했지만 돌아온 건 아버지의 진짜 사온 거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아니, 사람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사긴 뭘 산단 말인가? 나는 결혼을 빙자한 형태의 인신매매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길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고, 우리 동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라 치면 그 집 어른들 옆에서 조용히 어느 여자 인생을 망치려고 그러느냐 소리를 하면서 누군가의 인생을 돕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정말 억울하다고!
  카뮤가 어디 돈으로 데려온다고 구할 얼굴이던가!
  세상에 저런 미남이 돈으로 될 만큼 많았으면 범죄율이 반의 반으로 줄었을게 분명하다. 남녀 안 가리고 얼굴만 봐도 화가 풀리는데 어떻게 세상이 흉흉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 전에 애초에 범죄나 인신매매는 불법이지만.
  어찌되었든, 이런저런 부작용은 있어도 카뮤는 이 깡촌마을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 많은 양의 상자들은 다 뭐예요?]”
  “[마을 어르신들이 주셨다. 그러니까, ‘힘든 일 있거나 시집살이 힘들면 꼭 말혀…….’ 라고 하셨지. ‘시집살이’가 무슨 뜻이지?]”
  “[당신하고 연 없을 이야기요…….]”

  어머니가 방금 당신 준다고 닭잡아서 꿀에 절였는데 시집살이는 무슨 시집살이……. 딸이 나는 단걸 싫어한다고 울면서 이야기해도 듣질 않으시더라. 집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단내를 맡으며 카뮤의 박스를 받아들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은 해도, 이 계약결혼은 나쁘지 않다. 카뮤는 말은 좀 험해도 사람에게 꽤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고, 무엇보다 그의 얼굴만 봐도 즐거우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정말 결혼해도 이런 식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의 연극이라면, 위기는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당신과 같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면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면 행복한 일상이 영화의 시작을 이끌며 비극의 충격을 준비한다.
  우리의 위기는 비극이었을까?
  겨울이 한창이라 설향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날, 나는 카뮤가 좋아하는 한과들을 가득 챙겨서 조청과 꿀에 절이고 있던 참이었다. 단걸 싫어하는 내가 이렇게 과자들을 잔뜩 들게 되다니, 사람을 사귄다는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카뮤는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한 얼굴로 밖으로 뛰쳐나간지 오래였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건 꽤 자주 있는 일이었고, 이내 잔뜩 실망한 얼굴로 돌아오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의 실망을 준비하고 있다. 어딘가 허망하고, 끈 떨어진 연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계약 남편의 기분을 달래주려고 이렇게 성미에 맞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다. 이렇게 진심일 생각은 없었는데, 하고 나직하게 말했을 때, 카뮤가 큰 소리를 내며 뛰어 들어왔다. 어딘가 놀라고,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그 날은 날이 참 추웠다.

  카뮤는 처음 이름을 묻던 날 내게 보여주었던 어색한 어조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러면 그의 어색한 어조에서 불길함을 느끼고,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옆자리를 툭툭치며 거기 서 있지 말고 앉아서 이야기하라며 웃었다. 카뮤는 어색한 한국어로 그러마 이야기했고, 나는 옆집 어르신이 주셨다며 과자들을 내밀었다. 당신은 퍽이나 혼란스러운 얼굴로 과자를 거절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글쎄. 그가 빛을 등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창문 밖에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바람이 매섭게도 몰아치는 밤이었다. 창문이 덜그럭거리고, 비닐 하우스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주민 방송이 울리는 날이었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내게도 무서운 날이라서 나는 당신의 이야기가 본론에 들어가기 전까지 연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배경 위로 흩날리는 흰 눈발을 바라보며, 아무일 없어야 할 텐데 하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면 당신은 괜찮을거라며 본론을 이야기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고 말하면 누군가 날 비웃을까. 그가 말한 이야기는 그런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왕이며, 기사이며, 아이돌. 마법이나 신에 관한 것. 그는 그러한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자라 진심으로 믿고 있었고, 나는 그의 믿음을 비웃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말하건데, 인간은 시각에 약한 생물이다. 내가 속물이 아니라도 그가 그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호소하면 무엇이든 믿고 무엇이든 이루어주었을게 분명하다. 아니, 내가 아니라 누굴 앉혀놓아도 똑같을 걸. 이제와서 비밀스럽게 하는 이야기지만 그가 나한테 인감을 달라고 해서 집문서를 빼가고 보증을 서달라고 했어도 좀 고민했을게 분명하다. 아름다운 사람은 정말로 그 만큼 무섭다니까.

  “그래서, 카뮤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믿기 어렵지만, 그렇겠지.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일본에는 ‘사오토메 학원’도 내가 소속된 소속사도 없더군. 논리적으로 납득할 순 없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어.]”
  “그런가요.”

  나는 아주 기이하게도, 그의 말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나랑 같은 세계에서 태어났을리 없어. 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감이라는게 있다. 카뮤는 기이하게 겉도는 면이 있었고, 때때로 이 세계가 그를 어색해 한다거나 거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비웃을 법한, 하지만 혼자 생각하고 있을 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런 감각 말이다.
  덤덤하게 수긍하는 나를 두고, 카뮤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너는 내 말을 믿는건가? 하고 묻는 얼굴이 어딘가 불안해 보여서, 나는 생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나를 놀리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다며 웃으면 조금 기분 나쁘겠지만,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까. 내가 믿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어색해 하는 그에게, 나는 선선히 웃으며 과일을 내밀었다.

  “뭐, 가족이잖아요? 한 집에서 한 솥밥 먹으면서 한 방 쓴지가 얼마인데.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그런 말 해도 믿으셨을걸요? 아이고 우리 카서방 이역만리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아, 하고.”
  “[네놈, 저녁때 야채를 집어먹더니 정말로 어딘가 이상한건 아닌가? 아픈 곳이 있다면 빨리 말해야 병원을─]”
  “정상입니다. 하도 뭐라고 해서 좀 먹었더니 당신까지 그래요? 하여튼 남편은 남 편이라더니.”

  툴툴거리면서 카서방이 변했어. 같은 말로 장난치고 있으면, 어감이 좀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 카 서방은 좀. 내가 차랑 결혼한 것 같지? 나중에 새 성을 붙이자고 해야지. 김씨 괜찮을 거 같은데. 김카뮤, 흔하고 어감 좋고. 나중에 이름이 왜 그러냐고 하면 부모님이 천주교라서 세레명이 그거라고 하고. 괜찮은 시나리오를 머릿속에서 쭉 나열하고 있으면, 카뮤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까지 불안에 떨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게 기분 좋아서, 나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물론 바로 다음 순간에 눈이 마주쳐서 잠시 삼도천 구경도 하고 왔다. 저 얼굴은 내 심장에 심각할 정도로 해롭다.

  “그러면 이제 슬슬 잘 준비 할까요? 내일도 바쁘고.”
  “아아.”

  따뜻한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다 눈을 감는 순간. 한 침구를 쓰지 않고, 그럴 일이 있다면 세상에게 실례라고 생각은 들지만, 정말로 저 사람이랑 결혼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방학은 끄트머리를 향해 달려가고, 새해 떡국도 알차게 챙겨먹고 설빔도 챙겨 입힌 카뮤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한복이 저렇게 잘 받는 금발은 또 처음이네, 우리 학교에서 체험할 떄는 묘하게 뜨더니.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사진을 잔뜩 남겼다. 물론 그의 것만. 나랑 같이 찍으면 어물전 구경온 상감마마다. 아이고 저언하 꼴뚜기가 말을 할 줄 아옵니다. 물론 아예 안 찍을 순 없으니까 다같이 가족사진 한 장 정도는 찍었다. 남편이라는 거짓말은 이제 익숙해져서 의식하지 않으면 튀어나오지 않지만, 이런 순간에 미묘한 죄악감이 고개를 든다. 우리는 이렇게 모두를 속여도 되는걸까?
  우리 자신을 속여도 괜찮을까?
  하지만 봄은 착실하게 다가온다. 시간은 공평하고 땅은 정직하다. 서서히 추위가 물러서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발악을 시작할 무렵, 우리는 이제 의식적으로 이별을 피하고 있다. 꽃이 피면, 매화가 아니라 벚꽃이 피면. 봄이 오면, 여름이 가면. 조금씩 조금씩 긴 미래를 기약하고, 이대로 모든 것을 묻어두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머리 아픈 일을 뒤로 미룬다. 서로의 좋아하는 음식을 묻고, 정말로 사귀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미래의 고통을 알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오로라가 떴다.

  온 동네가 시끄럽게 들썩이고 뉴스에서 이상현상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며 억지로 과학을 가져다 붙일 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눈이 녹고 땅은 얼어 있던 밤,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고 달렸다. 운동화도 아닌 신발에, 추위를 막을 수도 없는 옷. 카뮤는 내가 입은 얇은 점퍼를 보더니 자신의 옷을 벗어서 건네주었고, 그의 옷은 이상하게도 나한테는 길었다. 길고, 사람의 온기가 밴 옷이 눈물나게 서러웠다.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아직 당신 없는 생활을 대비 못 했는데, 상상도 못하겠는데. 이 옷이 식으면 다시 덥혀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어딘가 사라져 버린다면 뒷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겁게 덮쳐와서 무릎이 꺾인다.
  그러면 앞으로 끌어당기는 손이 있다.
  카뮤는 달리는 와중에도 내 손목을 잡아 지탱하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과 달린다. 산의 꼭대기를 향해서, 저 증오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춤추는 빛의 너울을 향해서. 등 뒤에서 울어대는 동물들의 목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마치 사랑의 도피를 떠나듯이 작별을 향해 달려간다. 후회는 늘 늦고, 미룬 일은 이자까지 쳐서 달려든다. 싫어, 헤어지기 싫어.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얼굴도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놓을 준비를 한다.

  산의 정상, 원래 이름을 표시하는 비석이 있어야 할 곳에 그린 것 같은 문이 있다. 대기권 너머에서 춤춰야 할 빛의 너울은 우리 머리 바로 위에서 너울너울 옷자락을 흔들어대고, 우리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 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당신이, 여러 가지 색의 빛을 받으며 서 있는 당신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모든 일들을 당연하게 납득한다. 당신의 눈이 오롯한 현실이 된다.
  그리고, 울음기를 웃음기로 위장한 목소리로, 우리는 작별을 고할 첫 운을 뗀다.

  “[카뮤. 안녕이네요.]”
  “작별이군, 건강해라.”
  “[당신도, 너무 단 것만 먹지 말고. 편식도 하지 말고, 다른 사람 말고 당신의 몸도 좀 챙겨요.]”
  “네놈이야말로, 야채도 좀 먹고 제대로 잠도 자라. 장모님이랑 장인어른 걱정시키지 말고.”
  “[그러니까 네놈お前은 한국어로 ‘네놈’이 아니라니까…….]”

  마지막 배려로 서로의 언어로 대화하고, 우리는 손을 흔든다. 작별의 포옹도, 키스도 없다. 그냥 친구처럼,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던 양 강한 척을 하면서 작별 인사를 한다.

  “안녕.”
  “아아, 안녕이다.”

  그렇게 당신은 빛 너머로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꺼져가는 오로라 아래서 나는 오열한다. 당신은 나의 안에 깊숙하게 뿌리내렸고, 흙을 고르지 않고 뽑아낸 뿌리는 땅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버렸다. 미루고 미룬 대가는 얼어있는 땅에서 강제로 식물을 뽑아버리는 것.
  헤어지기 싫었어.

  그리고 벚꽃은 핀다.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가고, 나는 개강을 맞이하여 과제와 시험의 한낱 노예가 된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 수업만 들었으면 그 리포트 발로도 하죠. 근데 제가 한두개 듣는게 아니거든요. 마감일은 혹시 서로 맞추셨나요? 왜 같은 날이신지.
  기숙사에 살면 고향마을에 돌아갈 일은 많지 않고, 카뮤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만큼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간간히 부모님에게 그 잘생긴 외국 서방의 행방을 물어오는 사람은 꽤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두 분은 내 부탁대로 더 이상 묻지 않고 적당히 둘러대 주셨고, 슬프게도 내 애증하는 고향마을에는 외국인 서방이 도망쳤다는 소문이 도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사 온게 아니라고…….
  들을 사람도 없는데 변명을 하고, 맞이할 사람도 없는데 인사를 한다. 나는 이제 때때로 챙겨줄 사람도 없는 건강주스를 떠올리며 꿀을 넣는다고 다 맛있는게 아니라며 투덜거리고, 괜히 푸른 눈이 생각나서 콩나물이나 시금치 정도의 야채는 우물거리며 입에 넣는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따지자면, 그래. 카뮤와 결혼하기 전이랑 별 다를바가 없다. 당신도 그럴까?

  영화는 엔딩이다. 이제 스텝롤이 올라가는 시간이다. 관객들은 서서히 빠져나가고, 우리들은 저마다의 평범한 일상을 영위한다. 그래도 말이지, 영화에는 쿠키영상이라는게 있는 법이거든.

  이 깡촌 마을은 하여튼 일년이 지나도 변하는게 없어요. 종강과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눈 내리는 밤, 산을 넘던 나는 쌍욕을 내뱉었다. 이놈의 정부, 세금을 받아서 어디 쓰는지 몰라. 이런 깡촌에서는 표도 얼마 안 나온다 이거지? 두고 봐 내가 어? 언젠가 이 더러운 수도권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지방 공화국을 만들고 말겠어…….
  되지도 않는 소리를 투덜거리면서,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저번처럼 누군가 다쳐 있지 않을까, 또 눈의 요정 같은 남자가 벗고 누워있지 않을까. 아, 근데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변태같네? 번뇌에 젖은 자신을 반성하는 의미로 크게 발을 내딛고, 화려하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으악, XX! 비명처럼 내지른 욕설이 산중에 울리고, 나는 들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한다.

  “말은 곱게 하라고 늘 장모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응?

  “자, 일어서라. 이번에는 네놈이 저체온증으로 쓰러질 생각인가.”

  반사적으로 눈 앞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 여전히 현실감 없는 얼굴이 눈 앞에 서 있다. 저 얼굴로 사실 환단고기는 진실된 역사입니다, 같은 소리를 하면 진심으로 믿을지도 몰라. 김가메쉬가 존재할지 누가 알아?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길 씨도 있다고.

  “여전히 얼빠진 얼굴이군.”
  “카뮤?”
  “그럼 누구라고 생각했나.”

  당당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웃는 얼굴은 의심할 바 없이, 동네 발발이마저 미모로 평정해서 내 애증하는 고향마을을 발 아래에 둔 내 계약남편이 맞다. 그러니까, 일 년 전에 정신 없이 헤어져버린, 나의.

  “겨울이 됐으니 장모님 댁에 들려야지.”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올해는 결혼식을 해야 하지 않겠나.”
  “당신 신분이 없어서 혼인 신고도 안 되잖아요.”
  “아, 그거라면 문제 없다. 만들어 왔어.”
  “하아?”

  상상치도 못한 대답에 삑사리가 났다. 눈 내리는 밤, 조용한 산 속에 나와 그의 목소리가 길게 울린다. 신분을 만들어 왔다니, 무슨 과자 만들 듯이 그런 말을 해? 정말로 그럴 수 있는거야? 이것저것 생각이 얽힌다. 간첩이며, 건강 보험이며, 영주권에 호적 같은거. 성은 실크 김씨로 하자고 할까? 아니, 이게 아니라.
  이런 저런 말이 얽혀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당황스럽게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치고, 여전히 당당하고 오만하게 웃는 얼굴에 나도 웃음이 터진다. 그래, 사실 아무래도 좋다. 우리 동네는 작으니까 그런 행정 문제는 조금 미뤄두어도 괜찮고, 겨울에 다시 남편을 데려 왔다고 하면 도망치지 그랬어, 하고 아쉬워 하면서도 먹을 것을 챙겨주겠지. 한참을 소리내어서 웃으며,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밥은 먹었어요?”

  극장에 불이 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