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폰을 너무 오래 끼고 있어서 귀가 다 아팠다. 자고 일어나니 오후 세 시. 눌린 머리카락이 가관이리라. 탈색한 머리카락은 뿌리 염색을 안 한 지가 좀 되어서 이제는 커스터드 푸딩 스타일에 가까워졌다. 아, 나가기 싫은데. 숨쉬듯이 집밖을 혐오하는 생각을 하며 화장실로 가 칫솔을 물었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데 잠이 또 몰려왔다. 아마 전생에 상사에게 수당도 못 받아가며 야근하는 억울한 임금 노동자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양칫물을 뱉었다. 아직도 졸렸다.

  아무리 새벽 여섯시에 잤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오래 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그 때,



  “이제야 일어났구만.”



  낯선―그러니까, 못 보던 디자인은 아닌데 그걸 현실에서 볼 리가 없다는 의미에서― 남자가 책상에 엉덩이를 걸터놓고 앉아 있었다. 저게 미쳤나, 나도 저기엔 안 앉는데, 나 저기서 밥도 먹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꼼꼼히 그 남자를 뜯어보았다. 파란 바디수트를 입은 다부진 몸, 붉은 눈동자가 먼저 인상에 박혀오는 이목구비. 큰 키, 조화로운 신체의 프로포션, 야성적인 느낌이 나는 얼굴.



  “내가 잠이 부족하긴 한가보다.”



  자자. 내면의 소리에 설득되어서 다시 잤다.

*

‌  “초면에 그냥 내리 잠들어버리다니 너무하잖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환상도 헛것도 아니었다.
 
  다시금 잠에서 깨었는데 그 남자가 여전히 있었다. 파란 바디수트라니.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일요일 아침 9시의 모 방송처럼 무언가 덕지덕지 장식이 되어 있었다면 보기 편했을 것 같다. 하지만 왜 저 디폴트 복장이란 말인가. 당신 모 게임에서 하와이안 셔츠 입고 낚시도 가지 않았나. 아니면 적어도 캐스터 버전으로 나올 수는 없었던 건가. 당신의 캐릭터리티에는 일체의 불만이 없지만 복장에는 불만이 많다. 왜 그런 옷이 아닌 거지? 시선 둘 곳은 없고 갈 곳도 없고 현실 도피를 하기엔 감촉이 단단하더라. 어깨가. 만져봐도 되냐고 하자 그러라고 해서 검지 손가락 끝으로 한 번 찔러본 게 전부지만.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 하면 호쾌하게 웃으며 그러라고 할 것만 같아서 오히려 할 수 없었다.)



  “누가 꿈이라고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유감이지만 아니라고.”

  “최저임금 노동자로서 쌩판 모르는 남자 하나를 부양하고 살기는 어려움이 크다구요.”



  골이 다 아팠다.

  처음에는 그래도 오타쿠된 노릇으로서 애정 캐릭터 영접을 하는 건데 씻고 올까 싶었다. 그러나 낯선 남자를 기다리게 해놓고 씻는 건 아무리 봐도 원나잇 하는 상황밖에 떠오르질 않는다. 이상하잖아. 애초에 내가 왜 쟤 때문에 씻어야 해. 이거 어떻게 보면 무단 침입 아냐?

  ……그렇지만 경찰을 부르기엔 이러다가 휙 하고 환각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허위신고로 잔소리를 들을까봐 무서웠고, 만약 실체라고 해도 창문 와장창하고 나가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상대 앞에서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일단 창문 하나가 깨진다고만 쳐도 돈이 얼만가. 늘 자금난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판타지는 판타지로만 즐기고 싶다는 것이 늘 삶의 모토였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되나. 대책없이 낙천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좋아하는 얼굴을 한 남자를 인생에 하나 끼고 룰루랄라 살 수 있다고 좋아했을 텐데.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여자 좋아하죠.”

  “기가 센 쪽이 취향이지.”

  “취향까진 안 물어봤는데.”



  호스트로 팔아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배신은 배로 갚아준다는 대사가 갑작스럽게 머릿속을 잔잔하게 지나가버렸다. 애초에 배신이라기도 뭣한 카테고리의 악행이긴 하지만. 뭔가 잘할 것 같단 말이지, 호스트……. 그래, 팔아넘기는 게 아니라 그냥 면접만 보게 하는 거라면 내가 속이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본인도 나름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는데. 우리센 같은 데만 안 보내면 되는 거지. 일단 어딜 봐도 밤 새서 술 마시고 즐기는 건 그 누구보다도 잘할 것 같은 인간(정확히는 인간도 아니지만)이다. 머릿속에서 환희에 가까운 샴페인 콜을 외치는 그의 모습이 오퍼시티 50% 정도로 지나갔다. 잘 되면 그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이다. 일단, 호스트는 탈세가 가능하다고 하니까. 망상을 가속화하다보니 어느 샌가 말도 안 되는 일확천금을 꿈꾸고 있었다.

  오래오래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새 제2의 피부에 가까워진 롱패딩을 가볍게 걸친 뒤, 모자까지 들쓴 채로 그를 돌아보았다.



  “가봅시다.”

  “어딜?”

  “신주쿠 가부키쵸 1번지요.”



  비장하게 말하니, 따라서 일어났다. 이런 데서 비장해지는 사람 앞에서 구현되다니, 저 영령도 참 꾸준하게 불행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을 열었다.